앞에서 소개한 피츠버그 유학생 주말 토론 모임을 위해 맥주를 준비해두려고 인근의 맥주 집에 들렀다가 유정수(서울 사대 화학과 졸업, 재학시절에 단과대학 부회장으로 출마했을 때 내가 도와준 일이 있어서 친하게 지내었다.)를 만났다. 나는 이 친구가 나보다 1년 먼저 Texas Houston에 있는 유명 대학으로 유학을 갔었기 때문에 피츠버그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유정수는 화학의 한 분야인 결정학(結晶學, Crystallography), 비교적 새로운 분야를 피츠버그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반가웠지만 유학생 시절이라 자주 만나지는 못했어도 주말에 만나면 공부하는 분야에 관한 개론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내가 결정학이 물질의 화학적 구조를 규명하는 분야라는 것도 이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내가 피츠버그에 있던 기간에 그는 결혼을 하였다. 신부 오성화도 피츠버그의 다른 대학에 유학 온 학생이었다. 나는 3년 만에 박사과정과 학위논문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는 학위를 마치고 한국대학에 교수로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부인의 만류로 귀국하지 않고 post-doc을 핑계대고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세월이 지나 내가 강원대학교 총장으로 발령 받은 다음 해에 유정수에게 연락했다. 대학 시절에도 유정수는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것을 내가 알고 있었고, 한국의 부모님들도 유정수가 귀국하기를 학수고대 하고 있던 터라 당장 귀국하지는 못해도 한 1년간 한국에 와서 부모님께 효도하라고 전했었다. 유정수는 이 제안에 선뜻 응하여 강원대학교에서 1983년 9월 초, 2학기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하였다.
숙소, 학교 시간표, 연구실 등 모든 것을 준비하고 기다리는데 하필이면 피격 당한 KAL기에 타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었다. 그의 가족들은 미국에 머물고 유정수만 1년 계약으로 강원대학교에 와 있기로 하였다. 학과의 교수들, 학생들 모두도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사실 유정수에게도 고생하셨던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게하고, 강원대학교 학생들에게도 한국 사람이 미국대학의 화학박사 교수와 공부하면서 커다란 포부를 갖게 하려는 내 의도는 심한 자책감에 빠져들게 되었다. 고속도로나 산간 비탈길에서 마주 오던 상대방 자동차가 중앙선을 넘어와 내 차를 받고서 그 차의 운전자가 사망하게 되어도 그 가족들은 나를 원망하게 된다. 이성적(理性的)으로 아무런 잘 못이 없었어도, 감성적(感性的)으로 미워하게 되고, 본인도 근거 없는 일말의 도덕적 책임감을 갖게 된다.
나는 강원대학교 교정의 한 곳에 유정수를 기리는 느티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비석도 세웠다. 그러면서 유정수의 영혼이 나의 마음을 헤아려 강원대학교의 발전에 힘을 보태어 달라고 빌었다. / 정리=박해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