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대학생활의 낭만(2)
《제57화》 대학생활의 낭만(2)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1.18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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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 전반에 걸쳐 일종의 선두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부산사범학교 시절의 김현중 선생님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은혜로 대학에서 다른 교수들로부터도 인정을 받는 학생이 될 수 있었다. 김현중 선생님의 교육사 강의는 주로 서양 교육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단순 시대적 이론들의 열거가 아니라 인류사적(人類史的) 큰 틀에서 우리들의 사고양식(思考樣式)을 바로 잡아주는 명강의였다. 사범학교의 복도 벽에는 유명한 교육 사상가들의 얼굴들을 손수 그려서 액자에 넣어 걸어 놓고, 학생들이 오가며 이 얼굴 그림을 보고 항상 그의 교육사상을 익히도록 해주었다.

인문사회 분야의 연구에서는 기본개념들을 변천사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다음 연구과제들에서 균형 잡인 전체의 틀을 갖추게 된다. 나는 교육학 분야에서 이런 변천사적 틀을 사범학교 시절부터 철저하리만치 갖추었다. 이를 기초로 대학에서 한제영 교수의 교육사 강의에는 언제나 내가 보충 설명을 할 정도로 자신이 있었다. 이로 인해 나는 지금도 다른 교육사회학적 토론에서 쉽게 역사적인 사례들을 인용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청소년기에 이렇게 열심히 가르쳐주시는 훌륭한 선생님들의 모습이 장차 사회에 나가 일할 때 어떤 태도를 갖고 있어야 할지도 당신의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이런 어른에 대한 기본적 훈련이 대학에 들어와 교수님들 모시고 조교로 일할 때 잘 드러났다. 완고하기로 소문난 교수한 분은 좀처럼 학교에서 결재를 해주시지 않으셨다. 조금이라도 자기의 의견과 다르면 그냥 퇴근하여 댁에서 연구를 하셨다. 학과에서는 결재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그 일을 진행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젊은 교수님들은 나를 불러 댁에 가서 결재를 받아오도록 시켰다. 다행이 교수님의 댁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 완고한 교수님은 나의 어른에 대한 예의가 마음에 들었던지 내가 갖고 가는 결재 서류는 쉽게 결재를 해주셨다. 먼 훗날 고 정주영 회장님을 비롯하여 다른 큰 어른들을 가까이서 모시고 친숙함을 느끼며 일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범학교 시절에 길들여진 이런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교수님의 사모님은 갈 때마다 또 이 학생을 괴롭히지 말고 학교에서 처리하지 그랬느냐고 하시면서 항상 차를 내주셨다. 그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하마터면 잊힐 뻔한 국보적 민속설화자료들을 자비로 정리해놓으신 분이다. 그 자료정리를 한 학생이 전 울산대학교 P교수이다.

사범대학의 낭만을 회고하면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정범모 교수님을 모시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심리연구실에서 일하며 도시락을 난로에 구워 먹던 시절이다. 김신일 교수(전 교육부총리)의 말에 의하면, ‘…더러 연구소나 지방대학에 취직자리가 나도 빈털터리주제에 무슨 배짱인지 모두들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공부할 때는 공부에만 전념해야지,……그런 시절에 교수님이 연구 프로젝트를 따오는 때가 있었다.…교수님으로부터 받은 용돈의 크기를 이상주 형은, 오늘은 가랑비, 더 적으면 겨우 이슬비야,…어느 날인가 오랜만에 교수님의 방에 불려갔다가 돌아오며, 야, 오늘은 굵은 비가 왔어 외치는 것이 아닌가’ 했단다. 막걸리를 마시며 대폿집에서 다시 연구문제 토론을 하였었다고 한다. 사실 이것이 어려운 시절을 견디어 낸 뒤의 낭만으로 회상되는 것이다. 그때 공부하던 후배들이 나를 ‘상주형! 앞으로도 변함없이 우리의 큰형임을 잊지 마십시오.’한다. 이것이 낭만이다. / 정리=박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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