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집념의 시작(6)
《제55화》 집념의 시작(6)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1.13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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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이 대한민국에 끼친 비운(悲運)의 영향이야 여기서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피난민이라는 민족의 대 이동이 뜻하지 않은 문화의 대 이동이 되었고, 적어도 나에게는 서울문화가 가깝게 다가온 결과를 낳았다. 부산의 우리 집, 길 건너편에 서울에서 피난 온 마음씨 좋은 가족들이 살고 있어서 나로 하여금 서울 살림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 가족의 아주머니는 첫째로 친절하였고, 자연스레 우리 어머니와 왕래를 하고 있었다. 짐작컨대 경제적으로도 약간의 여유가 있는 집이었다. 둘째로 내가 서울로 대학시험을 보러 간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이 서울 집에 폐를 끼쳐야 되겠다고 생각하여 연락을 하였다. 당시 서울에는 우리의 먼 일가친척이 한 사람도 없었다. 다행이 이 집에 머물며 큰 걱정 없이 시험을 볼 수 있었다. 서울 길도 모르는 내가 헤매지 않고 시험장에 갈 수 있었다.

먼 훗날에도 입학시험의 문제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만큼 시험을 자신 있게 보았다고 할 수 있으나, 다른 해석도 나온다. 하나는 중학교 때, 성적이 조금 떨어지는 급우들이 시험 본 결과를 얘기하면서 맞은 문제만 기억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넓은 범위의 문제 중에서 집중하여 준비했던 문제가 그대로 나와 적중했기 때문에 기억되는 것이다. 나의 대학시험 문제는 내가 예측하여 집중했던 문제가 주관식 문제로 나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답안지를 썼던 기억이다. 이를 겸손하게 말하면 운이 좋았다는 것이다. 그 문제는 내각책임제와 대통령중심제의 비교이었다. 정말 자신 있게 답을 썼다. 다른 과목 문제들은 선다형이어서 잘 기억되지 않는다. 주관식의 논술형 문제를 당황하지 않고 쓸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사범학교에서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다루지 않던 ‘논리학’을 열심히 가르쳐주어서 그 효과를 본 것이다. 또한 사범학교 문예반 특별활동에서 도서관 담당으로 활동하며 시(詩) 짓기와 다른 글짓기에 훈련을 쌓았던 점이다. 재삼 강조하건데 전인교육(全人敎育)의 결과인 것이다.

시험장을 나서며 제일 머리에 떠올린 사람은 나의 누나, 이경분(李慶粉)이었다. 당시로서는 여자가 고등학교만 나와도 특권층에 속하던 시절이라 감히 대학에 진학할 생각을 못하고 미용학원을 나와 미용사로 집안 살림을 도와주고 있었다. 이 누나가 아들은 너 하나뿐이니 대학에 가야 한다고 우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등록금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시험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다짐하곤 했다. 꼭 합격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합격했다.

당시 사범대학은 교육학부 안에 교육학과, 교육행정학과, 교육심리학과가 있었다. 훗날 친구들이 시험 커트라인을 두고 비교하여 알게 된 것이지만, 내가 진학한 교육행정학과가 가장 높았었다. 상당수의 신입생들은 입학하면서부터 교육행정과는 행정학과 이니까 행정고시를 보아야 한다며 고시공부 준비를 하기도 했다. 나는 가정교사 자리 찾기가 더 급했다. 그리고 대학생활의 낭만을 만들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즐기려고 하였다. 이런 배경에는 아마도 사범학교 시절의 농구 선수, 문예반의 시 짓기, 밴드부의 호른 연주 그리고 영어공부에 열심이었던 영어분위기(英語雰圍氣)가 작용했던 것 같다. 독일어를 배웠으면 이런 낭만적 요소는 조금 중화되었을 수도 있다. 특히 중학교 시절에 칠성회(七星會)를 조직하여 클럽활동에 재미 붙였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무엇을 새로 조직하기 좋아했다. 참, 이때는 초등학교 때와 같은 왕따를 당하지 않고 병설중학교 여학생들하고도 잘 어울려 지내었다. 다른 중학교 학생들은 우리들의 자유스러움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 정리=박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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