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1.04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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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자랑스러운 점을 짚어보고 싶다. 하나는 아름다워서 자랑스러운 점이다. 시인 정진규(1939-)는 ‘삽’의 발음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지구상의 여러 언어에서 ‘삽’처럼 입술을 닫으면서 소리를 내는 낱말은 없다. ‘아름다움’이라는 낱말도 ‘사랑’과 같이 소리자체가 그런 느낌을 갖게 한다. 돋보기가 젊었을 때, 우리말을 전혀 모르는 외국 사람을 만나 물어본 경험에서 나오는 주장이다. 소리 하나만으로 느낌이 솟아나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일찍부터 삶과 앎을 같은 것으로 취급했던 지혜로움에 있다. 이홍우(李烘雨)는 ‘삶’을 ‘앎’으로 번역하면서 지혜로움을 찾아 확인한다. 그는 서울대 교수로 약 30년을 지내다 정년퇴임하였다. 운동(테니스, 하다못해 당구까지도)은 즐겨한 일도 없지만 여타의 다른 일에는 못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우선 월반하여 대학에 진학하였고, 영어로 ‘산다는 것, 안다는 것, 그리고 교육’에 관한 책을 써서 미국의 한다하는 학자(Bruner)를 곤혹스럽게 하였다. 대승기신론, 불교 경전을 번역·해설하였는데, 한 때 출가하여 수행의 길을 밟았던 김종서, 역시 전 서울대 교수까지도 어려운 책을 잘 썼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또한 기타를 치며 팝송을 부를 수 있다. 더욱 부러운 것은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사랑의 결실을 이루어내었다. 키가 그렇게 크고 잘 생긴 얼굴은 아닌데도 말이다. 아마도 자신이 주장하는 ‘앎’의 힘으로 사랑도 이겨낸 것으로 생각된다. 더구나 어려서 출판사에서 교정과 윤색하는 일을 하여 우리 말 글쓰기에 남 다른 경지에 올라 가 있다.

이런 배경으로 그가 연구에 몰두하던 교육과정(敎育課程)연구에서 ‘앎’의 중요성을 우리말의 ‘삶’에서 연원을 찾아 풀이하고 있다. 즉, 우리말의 어원에서 삶과 앎이 같은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우리말의 고어에서 삶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ㅏ’와 받침으로 ‘ㄻ’이었던 것이 ‘앎’으로 변화되어 삶과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곧 알아 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 조상의 지혜로움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 새 해가 시작되었다. 삶의 의미부여를 새 해 1월에 두는 것은 대부분 보통 사람들의 일이다. 돋보기도 올해에는 ‘삶과 앎’을 통합시키고자 나의 생활을 구조화(構造化)시키기로 하였다. 구조화라는 개념 자체가 건물의 구조를 연상 시켜 어떤 사물의 입체화를 의미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보다는 더 넓은 개념으로 생활 속에서, 특히 독서, 여러 신문의 칼럼과 인터넷의 여러 블로그 때로는 Facebook까지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서로 관계짓게 할 것이다. 이렇게 관계를 짓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나의 삶과 앎이 단편적이지 않고 항상 어떤 구조를 이루어가게 하려는 것이다. 이 구조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항상 유지되어야 하는 까다로운 조건을 갖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생산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죽은 지식, 살아있는 지혜가 되지 못한다. 창의성이 여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스스로 지식의 구조화에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삶의 태도가 앎의 방향으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건만 1월 1일의 해를 보고 의미부여하여 새 해의 다짐을 한다. 매년 새로 시작하는 금연도 있고, 금주도 있고, 월 한 권의 독서 계획도 있고, 주 1회의 등산 계획도 있다. 새해에 붙인 의미부여이다. 다 좋은 삶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금방 놓아버리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아도 이것을 탓하면 안 된다. 앎에도 이런 부분이 있어서 그렇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 어디 한 두 가지뿐일까. 어떻게 보면 그래서 살아가는 맛을 정말로 느끼게 된다. 모두가 한 번 마음먹은 것을 철저히 지킨다면 무서워서 못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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