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집념의 시작(2)
《제51화》 집념의 시작(2)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1.04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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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년이 올라갈수록 학교에서는 공부 잘 하는 학생으로 알려졌지만 우리 집 경제 사정은 크게 좋아진 것은 없었다. 6학년이 되었을 때, 반에서 급장(반장)을 하고 있는 나는 중학교 시험을 치르기 위한 학교의 특별지도, ‘과외공부’에 참여할 수 없었다. 먼 훗날 알게 된 일이지만 6.25 전쟁으로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 온,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학부모가 학교를 압박하여 별도로 입학시험 공부를 시키게 한 것이다. 소위 치맛바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처음 며칠 동안 이런 과외공부에 참여하지 못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우리 집 가정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고 있는 최병규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조용히 불렀다. 수업료를 내지 않아도 되니 방과 후 수업(과외공부)에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학교 공부를 마치고 쓸쓸히 혼자서 집으로 가지 않고 학교에 남아 급우들과 같이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너무 고마웠다. 그러고서 더러는 선생님께서 일이 있어 과외수업에 들어오시지 못하는 경우에는 내가 산수 문제를 내고, 또 푸는 방법을 급우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기억하건데 나는 산수공부를 잘 했었다. 선생님의 인정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왕따를 이겨내면 이렇게 성취감을 맛 볼 수 있다는, 모든 일에 집념을 갖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중학교 입학원서를 작성하는 새 해가 되었을 때, 담임선생님은 특차로 되어있는 부산사범병설중학교에 가라고 하였다. 아마 등록금이 싸고, 특차이니까 한 번 시험을 쳐보면 어떻겠느냐고 유도하였던 것 같다. 부모님께서도 별 다른 의견 없이 사범학교로 진학하여 졸업하고 바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면 가정형편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찬동하셨다. 당시 중학교 시험은 학교별로 문제를 내어 시험을 보게 하였고, 특차를 가장 먼저, 다음에 전기, 제일 나중에 후기로 나뉘었었다. 부산에는 부산중학교와 경남중학교가 좋은 학교로 알려져 있어서 속으로는 특차를 보고 난 뒤에 다시 볼 수도 있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시험을 보고 난 뒤에, 합격은 했겠지의 편안한 마음이었는데 내가 4등으로 합격한 것을 알게 되었다. 담임선생님께서도, ‘전체 4등으로 합격했는데 부산중학교에 또 시험을 치겠느냐?’하면서 네가 부산중학교시험을 치면, 너야 당연히 합격을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반 아이 중에서 한 명이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반 협박성 설득을 하였다. 어린 마음에도 우리 반 친구 하나가 나 때문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서 다시 속으로 ‘고등학교에 갈 때, 부산고등학교나 경남고등학교로 가면 될 것이다.’고 다짐하였다.

결과론적 해석이지만 진로지도의 분수령이 여기에 있었다. 부산사범병설중학교에서 고등학교를 내 마음대로 가게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친정 가는 기분으로 부산사범학교에 진학하였다. 사족으로, 나는 왕따를 이겨내고, 졸업식장에서 학생대표로 단상에 올라가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졸업장을 받았다.

/ 정리=박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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