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인천 이씨(仁川李氏) 충강공파(忠剛公派)
《제48화》 인천 이씨(仁川李氏) 충강공파(忠剛公派)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12.26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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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시대의 이자(李字) 징자(澄字) 옥자(玉字), 李澄玉 장군(將軍)의 후손이다. 할아버지의 호는 원봉(圓峰), 시호는 충강(忠剛:正祖 15년)이다. 나의 이름은 족보에 이상락(李相洛)으로 나오며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일명 상주(相周)라고 나온다. 인천 이씨 시조공으로부터 32세손이고, 충강공파로는 15세손, ‘락(洛)’자 돌림이다. 충강공파 14세손이신 아버지는 이(李)자 은(殷)자 택(澤)자이시다. 은(殷)자 항열(行列)이시다. 나는 6남매 가운데 위로 누나 한 분하고 모두 여자 동생들이다. 어머니 姓氏는 정(鄭)이다.

인천이씨의 후손으로서 문중의 외침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그 첫째 이유는 내가 키가 크다고 이징옥 할아버지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유전인자를 잘 타고 나서 그렇다고 하고, 둘째 이유는 아직도 ‘이징옥의 난(亂)’으로 기록되어 나올 만큼 조선시대 불충, 반역한 집안의 후손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내 키가 큰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키가 큰 편에 속하여 나도 키가 큰 것 같다. 꼭 할아버지의 유전자가 나의 대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견강부회하는 행동이다. 할아버지의 일화에 의하면 호랑이를 산 채로 잡을 만큼의 힘이 장사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실 1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소년 절제사가 되어 여진족을 물리쳤다.

6진 개척에 30년간을 몸 바친 함경도 도절제사 이징옥 장군이 여진족들의 추대로 대금국 황제가 된 것을 난을 일으킨 것으로 세조의 입장에서 전반부만을 확대하는 것이다. 세조 자신이 금세지난신(今世之亂臣), 후세지충신(後世之忠臣), 즉 그대는 나에게는 난신이오나 후세에 사람들은 그대를 충신으로 우러러 받들게 될 것이라고 한 말을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문중에서는 이징옥 장군이 암살당하지 않고 두만강을 건너 고구려의 옛 땅을 찾아 만주 일대를 우리 땅으로 지키고 있었으면 동양의 대국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본적지는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천포리 1022번지이다. 나의 호를 천포로 삼은 것도 천포리가 나에게는 뿌리가 되는 근거지이기 때문이고 나의 지적 발달의 결정적 시기가 되었던 곳도 천포리에서의 병치레였기 때문이다. 아마 장티프스에 걸려 학교도 못 가면서 독학으로 내공을 쌓았던 것 같다. 지금도 기억하는 ‘제비’라는 동시를 써서 학교에 제출하였는데 이 동시가 경상북도 초등학교 저학년 동시에 어떤 상을 받아 대구의 전시장을 담임 선생님과 함께 갔다 온 것이 어렸던 나에게는 커다란 자신감을 갖게 해준 것 같다. 건천의 시골에서 대구까지 갔다 오는 것은 학급 친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일본어로 공부하고 귀국한 나에게 한글을 깨우치고, 금방 동시를 써서 상을 받는 것은 대단한 전환점이 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런 글을 발표하는 이 시점에 잘 기억되지도 않는 할아버지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1880년에 태어나신 이자(李字) 준자(俊字) 필자 (馝字) 李俊馝이시다. 이렇게 잔칫상을 받으셨으니 생활에 여유가 있으셨나 보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어렵게 돌아와 무척 고생하셨다. / 정리=박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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