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배려
아름다운 배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10.3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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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늦가을, 대학졸업을 몇 개월 앞둔 시점에서 나는 서울의 모 잡지사 기자시험에 합격, 수습기자로 선발되었다. 상경한 지 일주일 뒤, 드디어 첫 출근의 날이 밝았다. 아침 일찍 서둘러 회사로 출근한 나는, 인사과 K과장을 따라 각 부서를 돌며 신입인사를 마친 다음 나를 기다리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잔뜩 긴장한 터라 얼떨떨한 기분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조심스레 자리에 앉아 우선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로 했다. 그런데 1분쯤 지났을까? 기자실 문이 덜컹 열리고 사환아가씨가 내게로 다가오더니 인사과장이 찾는다고 했다.

‘무슨 일일까?’

신입인사도 무사히 마쳤던 터라 다소 의아한 느낌도 들었으나 별다른 생각 없이 인사과로 향했다.

“거기 좀 앉게!”

K과장의 말투는 신입인사 때와는 달리 냉랭했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얼떨떨하기만 했다.

“김군! 자네는 기본적인 예의도 차릴 줄 모르나?”

예상치 못한 K과장의 다그침에 나의 두 눈은 더욱 뚱그레졌다.

“도대체 자넨 회사를 뭘로 보나? 옷차림이 도대체 그게 뭔가? 내가 자네 때문에 아침부터 사장님께 당해야겠어?”

“......”

나는 감색 점퍼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더군다나 첫 출근 아닌가. 그러나 나는 차마 변명을 못 하고 죄인인 양 고개를 떨군 채 한참을 서 있었다. 내일부터 당장 정장차림으로 출근하라는 K과장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핑 돌았다. 내일이면 닥칠 걱정스러운 상황은 이미 뒷전이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화장실과 회사 옥상을 자주 오가며 서러운 눈물을 훔쳐 냈다. 나의 첫 출근은 뜻하지 않은 눈물로 얼룩져 가고 있었다.

퇴근 무렵, 수십 차례의 망설임 끝에 나는 충혈된 눈으로 다시 인사과로 향했다.

“과장님,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양복이 없어서......”

K과장의 시선을 애써 피한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K과장은 한참 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얼마간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식은 땀 한 줄기가 나의 등을 타고 주룩 흘러내렸다. 바로 그때 갑자기 침묵을 깨는 K과장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사무실 가득 울렸다.

“그래? 아, 이 사람아. 그럼 진작 그렇다고 말을 하지 그랬어.”

K과장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나를 끌어내다시피 밖으로 데리고 나간 뒤 회사 근처 양복점으로 향했다. 내 인생의 첫 양복은 그렇게 태어났다.

80년대 후반, 민주화바람을 타고 잡지사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 과당경쟁을 벌이자 내가 몸담고 있던 회사에도 경영의 어려움이 닥쳤다. 차츰 직원들의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다. 어느날, K과장이 나를 회사 근처 커피숍으로 조용히 불러냈다. 이미 몇 개월째 경영난에 시달려온 회사의 간부 중 한 사람인 K과장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초췌한 모습으로 나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던 K과장이 나즈막한 투로 입을 열었다.

“김기자, 출판사 근무해 볼래?”

나는 갑작스런 제안에 눈만 크게 떠 보였다.

“회사가 언제까지 버틸지......”

말끝을 흐린 K과장은 무거운 몸놀림으로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그 S출판사라고 출판계에서는 제법 알아주지. 평소에 자네가 마음에 걸려 그 회사에 소개할까 하는데 한번 생각해 보겠나? 그곳에 잘 아는 사람이 있어서......”

미처 꿈꾸지도 못했던 K과장의 짧은 몇 마디가 계기가 되어 나는 몇 주 뒤 잡지사 기자생활을 접고 출판편집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출판계에 발을 디딘 지 어느덧 20여 년의 세월이 강물처럼 흘렀다. 그러나 내 인생의 물꼬를 터 준 그 고마운 분은 10여 년 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연락이 끊어진 지 이미 오래다.

아침 출근길, 회사 근처에 오래된 양복점 하나가 있다. 나는 매일 그 양복점 앞을 지난다. 그럴 때면, 밝은 아침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쇼윈도 위로 첫 양복의 추억이 오버랩되곤 한다. 그리고 그 고마웠던 분의 너그러운 미소도 아련한 기억 속에서 살며시 피어오른다. 오늘따라 그분이 더욱 그립다.

/ 김부조 시인 동서문화사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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