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영두 선생님
故 김영두 선생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9.27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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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장충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봄날, 나는 아버지의 고향인 공업도시 울산으로 전학을 갔다. 울산초등학교 5학년 2반. 키 순서에 맞는 빈 자리가 없어 임시로 맨 뒷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내 짝은 학급에서 키가 제일 큰 여학생이었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와 낯선 교실 분위기에 어색해 하는 서울 소년에게 그 친구는 무척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어떤 때는 누나처럼 꼼꼼하게 챙겨 주기도 하는 고마움을 보였다.

담임 선생님은 만능인(萬能人)이셨다. 남성미 넘치는 탄탄한 체격에 밝은 표정을 잃지 않으셨고 항상 긍정적인 생각이 담긴 가르침을 주셨다. 음악시간, 풍금 건반 위에서 선생님의 두 손이 어우러지면 아름다운 동요의 멜로디가 물결처럼 흘러넘쳤고 만돌린 줄을 신나게 퉁기시면 경쾌한 행진곡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목청을 가다듬고 굵직한 톤으로 불러 주시던 이은상의 ‘가고파’를 듣고 있노라면 남쪽 바다의 푸른 물결이 잔잔히 밀려왔고, 배구 코트에서 내리꽂으시던 강력한 스파이크는 얼마나 시원하고 통쾌하였던지 박수와 환호성이 멈출 줄을 몰랐다.

전학한 지 한 달쯤 지난 어느날, 수업이 끝난 뒤 선생님은 나를 남으라고 하셨다. 무슨 일일까. 초조한 마음으로 청소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급우들이 하나 둘 인사를 하고 썰물처럼 빠져 나간 텅 빈 교실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나는 창가에 마련된 선생님 책상 앞에 앉아 교실 바닥을 응시한 채 숨을 죽였다.

“부조야, 너 용익이 하고 웅변 한번 겨루거라.”

“예?” 갑자기 교실의 적막을 깬 선생님의 첫 마디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울산공업축제 웅변대회에 나갈 학교대표 선발이 예정된 시점이었다. 그러나 웅변이라고 하면 단연 용익이라는 얘기를 이미 들었던 터라 선생님의 갑작스런 제의는 너무 뜻밖이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웅변은 용익이가......”

그러나 선생님은 묵묵부답이셨다. 다시 무거운 침묵이 한참 흘렀다. 등에선 식은 땀이 주룩 흘렀다. 선생님은 한동안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신 뒤 다시 입을 여셨다.

“물론 용익이가 최고지. 하지만 열심히 연습하면 너도 잘 할 수 있을 거야. 일단 시작이라도 해보자. 내가 손봐 줄테니 모레까지 원고 써 오너라. 그리고 매일 수업 끝나면 남아서 연습하도록 하자.”

내성적이며 시 쓰기나 좋아 했던 서울 소년은 그날 이후 전혀 엉뚱한(?) 분야인 웅변 연습에 매달려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큰 진전은 없었다. 줄줄 외우던 원고도 막상 선생님 앞에서 리허설을 시작하면 30초도 지나지 않아 머릿속이 하얘지곤 하였다. NG 퍼레이드가 이어졌고 식은땀이 겨드랑이를 타고 흘렀다.

마침내 학급대표 선발의 날이 왔다. 용익 친구에 앞서 내가 먼저 교탁 앞에 섰다. 학우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자 와~하는 함성과 함께 격려의 박수가 쏟아졌다. 나는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그간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단 순조롭게 연기(?)는 펼쳐졌다. 그런데 약 5분쯤 지났을까. 결국 우려는 현실로 이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면서 다음 원고 내용이 떠오르질 않았다. 순간 몸이 동태처럼 굳어지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나는 그냥 눈을 감고 말았다.

그날의 승부는 나의 참패로 끝나고 용익이는 학교대표로 참가해 공업축제에서 1등을 했다. 같은 날 나는 백일장에 참가해 운문부 장원을 했다.

소질도 없는 웅변 때문에 당했던 창피스러움으로 그때는 선생님을 원망도 하였지만, 내성적이었던 제자를 좀더 적극적인 경험의 장(場)으로 이끌어 자신감을 키워 주려 하셨던 깊은 뜻을 헤아려 보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선생님은 오래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나 자녀들은 선친의 뒤를 이어 울산현대고와 학성고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하늘이 유난히 맑고 푸른 날은 선생님의 넓고 깊었던 사랑이 더욱 그립다.

/ 김부조시인·동서문화사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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