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에 환호하는 사람들 명품에 절망하는 사람들
명품에 환호하는 사람들 명품에 절망하는 사람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8.25 20: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느 스포츠 신문에서 「‘캠핑 명품족’ 등장에 우는 서민 캠핑족」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았다. 캠핑 명품족과 서민 캠핑족을 대비하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호화 오토캠핑족들의 사치에 서민 오토캠핑족들이 울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즉, 호화 오토캠핑족들이 서민 캠핑족들에게 ‘위화감’을 주어 문제라는 기사다. 또한 일부 캠퍼들의 과시욕으로 캠핑 본연의 의미를 훼손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그 기사는 덧붙이고 있었다. 호화 오토캠핑족이 서민 오토캠핑족들에게 어떻게 위화감을 주었는지는 그 기사에서 밝히고 있지 않았다. 아마도 고가의 캠핑장비들 때문에 서민 오토캠핑족들이 기가 죽어서 위화감을 주었다는 것으로 추측된다.

기사를 읽으며, 명품에 환호하는 우리 사회, 빈부의 차이가 가져오는 상대적 박탈감 등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또한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는 어느 정당의 슬로건도 떠올랐다. 고가의 오토캠핑장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서민 오토캠핑족들에게 위화감을 주는 것인가? 이른 바 명품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위화감을 주는 것인가? 부자는 그 존재 자체가 서민에게 위화감을 주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사람들은 명품에 환호하는 사람들을 속물이라고 비난하기도 하고, 명품쇼핑을 하고, 저녁식사 값으로 기백만 원을 써대는 과소비가 서민들에 위화감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서민들을 절망하게 만든다고 한다.

절망, 그 절망의 근원은 무엇일까? 자기의 경제력으로 구입할 수 없는 물품을 거침없이 구입하는 모습을 보고 상대적 박탈감, 즉 ‘나는 할 수 없다’는 데에 그 절망의 근원이 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나도 그와 같은 소비를 하고 싶은데, 내가 가지고 있는 경제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일으키고 절망하게 만든다.

만약, 명품에 대한 소비욕구가 없다면, 다른 사람들이 명품쇼핑을 하더라도 내게 아무런 박탈감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즉, 명품에 환호하는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의 명품쇼핑에 절망하는 사람들은 명품에 대한 소비욕구가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다양한 광고, 그에 따라 우리의 의식에 각인된 명품은 이미 하나의 물품이 아니라 행복, 성공 등의 가치를 표상하는 것이 된다. 명품에 환호하는 것이나, 명품쇼핑을 하지 못하는 것에 절망하는 것은 모두 허상을 추구하는 것에 불과하다.

고가의 오토캠핑족에 주눅이 든 서민 오토캠핑족들도 결국 고가의 오토캠핑장비를 구입하고 싶다는 욕구가 그의 의식 저편에 있는 것이다. 그 장비가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자신을 충전하고자 하는 캠핑에 필요한 것인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도 있고, 부자도 있다. 일하기 싫은 사람들도 있고, 일중독이라고 할 정도로 열심인 사람들도 있다. 모두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사람들이다.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그 개성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잘 어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자의 존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주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명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부자가 혹은 명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모욕하거나 폄하한다면 그것에 의하여 위화감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존재 자체만으로 위화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만약, 명품쇼핑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 절망감을 느낀다면 이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의 물욕(物慾)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허상이 스스로의 삶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지 말이다.

/ 이태섭 문화평론가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