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이 뭐기에
세계유산이 뭐기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8.1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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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관광객이 가장 많이 가는 중국의 관광지 중 후난성 ‘무릉원풍경구’가 있다. 흔히들 ‘장가계(張家界)’라고 일컫는 이 지역은 스촨성의 ‘구채구(九寨溝)풍경구’와 더불어 자연이 만들어낸 환상으로 대중적 관광지로 각광받는다. 이 두 곳은 지난 1992년에 유네스코로부터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됐다.

장가계와 구채구에는 자연유산으로 등록되기 전, 등록되고 나서도 한참동안 지역민들이 풍경구 안에 거주했다. 그 때는 장가계의 주산인 천자산에 오를 때 가파른 비탈을 일군 따비밭에 엎드린 농부들을 쉽게 볼 수 있었고 구채구의 골짜기마다 티베트족들이 자연스럽게 형성한 마을이 정겨웠다.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조화가 어우러져 그곳이 바로 낙원이라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그랬던 곳이 1990년대 말부터 달라졌다. 그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모두 사라졌다. 유네스코가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하면서 이곳의 주민들을 이주시켜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산을 배경으로, 깊은 계곡에 묻혀 살던 그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들이 떠나고 남은 빈집에는 거미줄이 쳐졌고 폐가를 감싼 흉흉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애초 그곳의 민가에서 민박을 했던 나의 아름다운 추억도 사라져 버렸다. 나는 시골집의 순박한 인심이 안긴 옥수수와 감자가 넉넉한 광주리를 앞에 낀 채 집앞 동산에 나앉아 산머리에서 지던 태양을 바라봤었다.

유네스코는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일체의 인위적 간섭을 배제해 줄 것을 요구한다. 당사국은 유네스코의 요구를 적극 받아들여 마치 상전의 영을 받드는 하인처럼 군다. 유네스코의 요구는 충분히 타당하다. 그들이 지정하는 자연유산 속에는 멸종되기 직전의 동식물이 포함됐을 수 있고 자연은 인간의 간섭으로 쉼 없이 변형되거나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건너뛰고 말았다. 자연이란 인간과 공존할 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동양의 인본주의 사상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자연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무릉원과 구채구는 실경산수의 아름다움에 수천년 이어온 인간의 생활상이 버무려졌을 때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뤘다. 지금은 경계를 두르고 팻말을 세웠으며 말끔한 상가건물을 새로 지었다. 넓디넓은 풍경구는 밤이면 텅 비어버린다. 그곳에는 이제 사람의 향기가 빠져 있다.

경주역은 100년의 역사를 가진다. 전국의 역들이 최신식 외양으로 변모를 거듭했어도 1918년에 지어진 경주역사의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경주를 스쳐간 수많은 여행자들은 경주의 관문인 역을 오래도록 기억한다. 그러나 최근 이 아름다운 역사를 외곽으로 이전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최소한 도심 교통난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지점에 위치한 경주역이 옮겨가는 이유를 듣고 절망했다. 유네스코가 경주시가지를 세계유산으로 지정하기 위해 시가지 철도를 이설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주시는 이 점을 곧바로 수용했고 경주의 현대사를 안고 있는 역사를 옮기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모양이다.

경주의 실책은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쪽샘지구를 공원으로 만들겠다며 오밀조밀 모여 살던 시민들을 흩어버렸다. 1천년 전 유물을 반드시 당대에 발굴하고야 말겠다는 조바심이 1백년 넘게 사람의 손때가 묻은 자연 거주지역을 뭉개고 만 것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고 책상머리 위에서 결정한 행정의 전형적인 실책이다.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면 무엇이 달라질까? 예산의 지원은 한 푼도 없는 것으로 안다. 다만 지정될 경우 홍보효과는 있어 여행자들이 그곳을 찾는다는 이점은 있다. 자연유산의 경우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 갑자기 여행자들이 쇄도해 환경과 생태계가 파괴될 수 있다는 점은 간과됐다.

울산은 지금 대곡리 선사유적군을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마치 세계유산 등재가 지상과제인 것 같다. 본말이 전도됐다. 훼손이 되고 있다면 그 훼손을 막는데 지혜를 모으는 것이 우선과제다. 지구상에는 9백여개의 세계유산이 있고 그 유산을 모두 돌아보기 위해 한 곳에 5일 머문다고 가정한다면 12년의 세월을 길 위에서 보내야 한다. 반구대 암각화는 아직 그 가운데 끼지 못했다.

/ 이상문 취재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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