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자존심
국가의 자존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8.1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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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매스컴을 통해 뜨거운 이슈로 달아오르며 분노의 목소리를 자아내게 한 소설이 하나 있었다. 미국인과 결혼한 일본 여성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의 자전적 소설로, 1986년에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대나무숲 저 멀리서(Far from the Bamboo Grove)>인데, 한국에서는 2005년 <요코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나왔다. 줄거리는, 일본이 2차 대전에 패한 뒤 이 책의 저자인 11살 ‘요코’가 어머니, 언니와 함께 1945년 7~8월 동안 함경북도 나남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겪은 일들을 적은 것으로 지극히 간단하다.

그러나 소설 내용 속에 인정 많은 한국인도 비치긴 하지만, 간간이 나타나는 가해자 한국인의 비인륜적인 모습과 패전국 일본여성에 대한 한국인의 성폭행을 간접화법으로 묘사한 점, 미국판 표지에 쓰인 ‘목숨을 걸고 한국을 도망쳐 나온 실제 이야기’ 등이 끝내 문제를 일으켰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책이 미국 어린이들의 영어 교재로, 심지어는 서울 외국인학교의 인문분야 교재로도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착한 일본인, 나쁜 한국인’ 이미지를 심어 준 꼴이 되었다.

결국 이런 내용이 역사의 진실을 왜곡했다며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어린이가 이 소설을 교재로 채택하고 있는 학교에 등교를 거부하면서 논란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의 확인 여부를 떠나 한국과 일본 국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건이었다. 논란의 불길이 점점 확산되고 한국 국민들의 분노가 절정에 다다를 즈음, 마침내 저자는 한국 독자들에게 사과의 편지를 보내오는 등 사태수습을 위한 제스처를 취했지만 참으로 유감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극히 일부이긴 했겠지만 패배해서 쫓겨가는 패전국의 여성들을 성적으로 유린했다는 내용에 발끈한 우리는, 확실한 근거 자료 없이 체험의 형식을 빌어 대한민국 국민의 명예를 훼손한 데 대해 극심한 불쾌감을 나타냈었다.

그런데 이 <요코 이야기>보다 훨씬 앞선 40여년 전에 출간된 <내가 넘은 38선>이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후지하라 데이’로, 일본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국가의 품격>의 저자 ‘후지와라 마사히코’ 교수(오차노미즈대학)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만주에 거주하던 ‘후지하라 데이’가 26세 되던 해 일본이 패망하자, 어린 아들 ‘마사히코’를 비롯, 세 아이를 데리고 필사적으로 만주를 탈출해 압록강을 건넌 뒤 38선을 넘기까지 겪은 시련의 과정을 담은 내용인데 역경에 처했던 그들을 내 가족처럼 정성껏 보살펴 준 어느 한국 여인의 따뜻함이 담겨 있다. <요코 이야기>와 비슷한 ‘패전지역 탈출기’의 내용이지만, 저자 일가족이 겪은 고생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일본이 패전 후 그 당시 만주에 남은 일본인들의 운명은 참극 그 자체였다. 중국인과 학대와 소련군의 약탈, 성적 유린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저자 일가족은 요행히 이곳을 탈출했지만 영양실조와 전염병의 유혹에 시달리며 살아 있음에 진저리를 쳤다.

이상 언급한 두 가지의 저서 <요코 이야기>와 <내가 넘은 38선>에는 필사적인 패전지역탈출의 내용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맥락을 같이 하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부각된다. 즉, 한국인을 보는 시각의 차이가 드러난 것이다.

<내가 넘은 38선>의 저자 ‘후지하라 데이’는 항상 아이들에게 말했다.

“조선사람들은 궁핍한 처지에서도 우리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베풀어 주었다. 너희들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요코 이야기> 저자가 자신의 모국인 일본이 저지른 엄청난 잘못을 몰랐다고는 보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겪은 고난을 강조한 나머지 그 보다 더 극심한 고통을 당한 한국민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었다. 마치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인 척 얼버무려 보겠다는 얕은 생각이 그 소설을 통해 엿보인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요코 이야기> 사건을 재조명하면서 나라를 한 번 빼앗기면 회복이 된 뒤에도 국가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김부조 시인·동서문화사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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