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 삼천리
방랑 삼천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8.02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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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지평선에 해가 저무는데/ 나를 반겨줄 사람은 오늘도 없네/ 흘러간 반평생이 하도 허무해/ 껄껄 웃고 떠나간다 방랑 삼천리// 발길이 닿는 대로 나는 가련다/ 가다가다 멎는 곳이 고향이로다/ 지나온 타향살이 괄세도 많아/ 쓴웃음을 지며 간다 방랑 삼천리

1968년, 필자가 서울 장충초등학교 4학년이던 시절. 제법 히트곡 대열에 올랐던 한 노래가 있었다. 곡명은 ‘방랑 삼천리’. 김석보 작사, 전오승 작곡, 여운 노래. 가수 ‘여운’은 ‘과거는 흘러갔다’라는 곡으로 이미 유명세를 탄 이후였다.

1950년대 중반, 대사업가의 꿈을 안고 고향 울산(강동 금천마을)을 떠난 아버지(1998년 작고)는 부산 범일동에서 날염업(捺染業)에 뛰어들어 승승장구하며 큰돈을 거머쥔다.

이어 새로운 사업인 건설업에 투자,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불운일까 아니면 과욕이었을까? 경험부족과 전문 사기단의 농간에 휘말려 아버지는 하루 아침에 전재산을 날리고 말았다.

1964년, 강추위가 몰아친 겨울 새벽. 어머니가 단잠에 빠진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잠에 취한 눈을 비비며 주위를 살폈다. 백열등은 대낮처럼 환했고 이미 두툼한 외투를 챙겨 입은 형과 누나가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날 새벽, 정든 범일동 저택과 가슴 아픈 작별을 고하고 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가족은 모두 아홉. 슬하에 2남 3녀를 둔 아버지에게는 출가하지 않은 여동생과 중학생 남동생까지 딸려 있었다.

서울 장충동 산꼭대기 달동네. 광산업을 하던 당숙의 도움으로 겨우 월세방 2칸을 얻어 아홉 식구가 둥지를 틀었다.

그로부터 약 6개월, 아버지는 몇 안 되는 친척이나 지인들을 찾아 다니며 취직자리를 알아보려 분주히 떠돌았다. 그러나, 낯선 타향은 일자리를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기대를 걸고 찾아가면, ‘알아보는 중이니 좀 더 기다려 달라’는 말만 듣기 일쑤였다. 저녁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땅거미가 짙게 깔리면 아버지는 축 처진 어깨를 가누며 장충동 산동네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명동에 있는 당숙 회사로 출근하라는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하늘이 우리 가족을 도운 것이다. 이듬해인 1965년, 나는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숙의 회사를 다니던 중인 1966년, 아버지는 강원도 정동진에 있는 ‘영풍탄광’ 책임자로 발령을 받아 홀로 서울을 떠났다. 사업의 성공과 실패, 인생의 환희와 쓰라림을 번갈아 맛보아야 했던 지난날들을 가슴에 묻은 채 아버지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향해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 당시에는 평화롭고 조용한 어촌마을이었던 정동진. 아버지는 모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아늑한 품에 안겨 일과가 끝나면 시나 수필, 가요 작사 등의 글쓰기에 젖어 가슴에 남은 지난날의 아픔을 달래곤 하였다. 바로 그 당시에 여러 편의 작사를 하였는데 그 중에서 제법 히트 대열에 올랐던 곡이 바로 ‘방랑 삼천리’였다. 지금 회상해 보면 그 때 아버지가 40대 초반이었니 지금 내 나이보다 10년 쯤 더 젊었을 때였다. 우연일까? 아버지의 직업은 나와 달랐지만 나도 타향인 서울에서 어느덧 30년 가까이 살고 있다.

거의 빈손으로 상경해서 뿌리를 내리기까지 내가 겪었던 시련의 나날들... 그러나, 암울했던 시절, 아버지가 침묵으로 견디어 낸 그 좌절과 시련의 아픔에 어찌 비할 수 있을까?

초등학교 시절, 라디오에서 ‘방랑 삼천리’가 흘러나오면 가사의 의미는 모른 채 신나게 따라 부르던 노래. 이제 50대 중반을 바라보며 가사를 찬찬히 음미해 보니 이 노래를 작사하실 때의 아픔이 헤아려 지고 30년 가까이 타향 서울에서 살아 온 날들의 애환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지금도 노래방 책자에 당당히 올라 있는 ‘방랑 삼천리’. 매일 지루하게 반복되는 삭막한 도시의 일상에서, 어느 날 문득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습관처럼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허전한 마음을 달래 보곤 한다.

/ 김부조 시인·동서문화사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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