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경찰의 초석들
울산 경찰의 초석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3.11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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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부터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울산지역 경찰의 주 임무는 공비토벌이었다. 전투경찰이 있긴 했지만 대규모 작전에 투입됐고 농촌, 산간지역에 야음을 틈타 출몰하는 공비준동은 해당 지서와 본서 기동병력이 담당했다.

긴급출동 차량은 서장 관용차 겸 병력 수용용 4분의3톤 트럭 한 대가 전부였다.

개인 화기는 일제가 패망하면서 남기고 간 38식, 99식 장총이 대부분이었고 한국전이 발발하면서 카빈, 엠원 소총이 지급되는 수준이었다. 급료는 현금 대신 무명, 쌀, 보리 등이 지급되는 경우가 많았고 지급 날짜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울산경찰 ‘공비 토벌사’에서 가장 획기적 사건은 남로당 제4지구당 사령관 남도부를 체포한 일이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으로 패잔병이 된 인민군과 지역 공비 약500명이 인민군 중좌 남도부의 지휘 하에 신불산 681고지에 거점을 쌓고 상북, 삼남, 삼동, 두동, 두서 지역에 출몰, 우익인사 납치 살해 방화 약탈을 자행했다. 이들은 박격포, 기관총 등 중화기를 갖추고 있어 경찰 병력만으로 제압이 불가능 해, 미 보병10군단 1대대 및 공군 전투기 지원까지 받아야 할 정도였다.

1953년 6월7일 삼남지서가 공비에 피습중이란 보고를 받고 당시 울산경찰서장 김종신 총경이 현장으로 출동하다 역공 당해 순직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계속되는 토벌에다 휴전협정 조인으로 지리멸멸해 진 남로당 제4지구당은 와해됐고 대구 동인 등에 숨어 있던 남도부는 54년 9월 울산경찰서 사찰계에 의해 체포됐다.

살신 보국하던 당시 경찰관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많았지만 보급품 부족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경찰모와 복장은 어느 정도 규격을 갖췄으나 신발이 형형색색이었다고 한다.

운동화, 군화 심지어는 검정 고무신을 신는 일도 있었다. 요즘 경찰들이 들으면 먼 ‘별나라 이야기’ 쯤으로 여길 만큼 보급상황이 빈약했다. 숙식은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하니 가정생활은 개념조차 없던 시절로 보면 된다.

‘빨치산’ 취재를 위해 신불산, 대운산을 드나들 때 많은 도움을 줬던 분이 고 김홍조 옹이다. 김옹은 1948년 국립경찰이 창설되면서 순경부터 시작해 공비토벌 공로로 특진을 거듭, 1955년 경위로 승진한 사람이다. 격동기 울산 경찰의 산 증인인 김옹이 ‘울산 경찰 고난사’를 한마디로 요약했던 말이 기억난다.

“학교 교실 마룻바닥을 뚫고 특공대 4명이 들어가 5일을 버텼지. 나중에 나와 보니 눈과 이빨만 빠끔하고 나머지는 새까만 생쥐였어.”

울산군 범서면 소사리 서사초등학교 교장 딸을 공비들이 납치해 간 뒤 잠복근무 했던 당시 상황을 말해 주던 김홍조 경위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요즘 순경 채용시험에 고학력자가 대거 몰려와 경쟁률이 평균 20대1을 넘는다고 한다.

경찰관들이 입은 제복도 산뜻해 보이고 겨울철에 착용하는 방한복도 추위를 넘기는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고난스러웠던 선배들 보다 처우, 보급, 복지 등이 한결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부족함이 많다고 느끼는 것이 신세대 경찰관들의 생각이다.

지난 99년 7월2일 울산 지방경찰청이 개청된 이래 제11대 청장 윤시영 치안감이 취임했다.

깨끗한 외모에 학식을 갖춘 윤 치안감의 모습과 시꺼멓고 익살스러웠던 고 김홍조 경위의 얼굴이 겹쳐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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