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세기부터 7세기까지 오랜 세월동안 조성된 아잔타 석굴은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덮어놓고 외기만 했던 인도문명의 백미다. 석굴 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채색 벽화는 장구한 세월 무더운 골짜기의 석굴 속에서 견뎌낸 것이니만큼 현묘하다. 전문가가 아니어서 그 조형적 가치와 종교적 의미를 미주알고주알 주어 섬길 수는 없지만 우선 석벽에 쌀겨가루나 돌가루, 혹은 점토를 두텁게 덧칠해 캔버스를 만든다.
누 구였을까? 어느 종교적 신심이 가득한 왕은, 이 골짜기에 육중하게 박혀있는 바위더미를 발견하고, 그 바위를 정교한 솜씨로 파낼 수 있는 석수장이들을 불러 모아 석굴사원을 만들고자 했을 것인데, 하필이면 왜 척박하고 후미진 이 골짜기를 선택했던 것일까? 외딴 골짜기, 깊고 음험한 그곳에서는 거대한 바위를 자르고, 뚫고, 파내는 힘찬 쇠망치소리가 매일 울려 퍼졌을 것이고, 그 세월은 천년에 가깝게 이어졌다.
말발굽 형상으로 형성된 이 석굴사원에서 어느 날 갑자기 인적이 뚝 끊긴 것은 또 불가사의한 일이다. 승려들도 떠나고, 석공들도 한순간에 일손을 놓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아잔타를 조성했던 이들은 7세기 초에 갑자기 아잔타의 골짜기를 버리고 남서쪽으로 약 130km 떨어진 엘로라로 옮겨와 새로운 동굴을 조성하기 시작한다. 학자들은 그들이 느닷없이 아잔타를 떠난 이유에 대해서 불교가 쇠퇴한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더러 주장하고 있지만, 엘로라 석굴군에서도 초기에는 불교사원이 조성된 것으로 봐서 그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 후 아잔타는 석굴을 조성한 날들보다 더 긴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밀림 속에 묻혀 잠에 빠져든다. 해가 뜨고 지는 물리적 시간과는 상관없이 아잔타는 밀림 속에서 잠시 시원의 잠 속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다만 육중하고 경건한 존재를 때때로 확인하기 위해 끌과 정이 망치를 맞아 바위로 파고들던 맑고 쾌활한 소리가 울림이 돼 밀림 속을 환청처럼 길게 메아리쳤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1819년 호랑이 사냥을 위해 이 골짜기를 누비던 영국 병사 존 스미스에 의해 아잔타의 잠은 끝났다. 인도인 하인을 대동한 그는 밀림 속에서 언뜻 비친 갈색 호랑이를 발견하고 뒤를 쫓았다. 포획자의 집요한 추격을 뿌리치며 호랑이는 날렵하게 밀림을 누비며 달렸다. 한 번 걸려든 사냥감을 놓쳐본 적 없는 존 스미스와 하인들은 포위망을 넓게 치며 호랑이를 찬찬히 조여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낭떠러지를 만났다. 호랑이의 궁둥이를 추적하던 그의 눈길은 절벽 아래 그믐달처럼 펼쳐진 동굴사원의 우묵한 형상에 머물렀다.
나 뭇가지에 가린 첫 번째 석굴의 출입구를 발견한 그는 하인에게 횃불을 밝히게 하고 조심스럽게 굴속을 들여다봤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연꽃을 들고 있는 보살이었다. 그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한줄기의 전율이 일직선으로 내리꽂혔다. 아연실색한 그는 다시 검은색 얼굴을 한 공주와 그 주위에 풍만하고 아름다운 시녀들의 그림이 그려진 벽화도 발견했다. 그리고 하나의 머리에 몸통이 네 개나 달린 사슴 조각도 보였다. 스물아홉개의 동굴을 차례로 발견한 그는 서둘러 막사로 돌아왔다. 해가 뉘엿뉘엿 아잔타의 서녘하늘로 지고 있었다. 다음날 함께 탐사를 시작한 영국 병사들에 의해 아잔타 석굴은 천년동안의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