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과 처음 조우한 인도 벵골만 최대 도시
대영제국과 처음 조우한 인도 벵골만 최대 도시
  • 이상문 기자
  • 승인 2010.05.03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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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만 ‘기쁨의 마을’로 부른 이유 있었네

11. 인도 캘커타-시티 오브 조이

행복하고 기쁜 일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도시 캘커타의 옛 이름이 ‘시티 오브 조이’라는 사실은 역설이다. 지금도 캘커타는 인도의 모든 가난과 혼란, 부조리의 집산처럼 여겨지는 도시다. 저녁 무렵 하우라강을 넘어가는 철교 위는 고된 노역에 시달렸던 하루를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노동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강이 가르는 도시의 동과 서는 신도시와 구도시가 대칭으로 존재한다.

패트릭 스웨이지가 나왔던 영화 ‘시티 오브 조이’의 무대는 신시가지에서 하우라리강을 넘으면 나타나는 전형적인 빈민촌이다. 그러나 지금은 도시의 규모가 확장되고 정부가 새로운 개발계획으로 도시의 형태를 바꿨고 영화 속에 나왔던 수많은 빈민들은 새집에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그 새집이라는 것이 불과 다섯평 안팎의 좁은 공간에 불과하다. 그들의 가난은 쉽게 극복되지 않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지금 그 마을은 절망에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다. 구걸하던 동냥그릇을 던지고 하우라강을 건너 신시가지의 일터를 찾아 떠나고 아이들은 서양인이 만든 학교에 가서 글을 배운다. 적지만 하루하루 땀 흘려 번 돈으로 가족들은 굶주리지 않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운 글을 ‘가갸거겨’ 욀 때 무지의 수렁에서 벗어나는 세대의 희망을 보며 행복해 한다. 과연 ‘시티 오브 조이’가 맞다. 시성 타고르와 성녀 테레사 수녀라는 당대의 빼어난 인물이 캘커타의 정신적 이미지를 끌고 나가고 있는 이면에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일은 지난 1999년 3월에 있었다. 캘커타의 사창가 소나가치 지역에서 생긴 일이다. 그곳의 몸 파는 여인 330여명이 장기기증 운동단체인 ‘가나다르판’에 단체로 서명을 했다. 자신들이 죽으면 모든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것이었다. 아시아 에이즈 환자의 30%가 인도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에 두려워 한 사람들이 일제히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녀들은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인체 해부 실험용으로라도 써주세요. 동물보다는 인간의 장기가 도움이 될 테니까요.”

밤이 되면 벵골만의 습하고 무더운 바람을 맞으며 길거리에 나서 육정이 그리운 사내를 자신의 협소한 침소로 불러들이는 그녀들에게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 것은 가난과 배고픔, 질병과 사람들의 손가락질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가 열악할수록 악착같은 자기애가 발동된다. 생존본능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자신들의 몸을 조각내어 다른 이를 구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살아생전에도 자신의 몸을 던져 사내들의 육허기를 채워주던 일을 하다가 죽어서도 병으로 시들어가는 생명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다. 악취와 병균이 창궐하는 사창굴에서 피어난 그 아름다운 마음을 진흙구덩이에서 피어난 연꽃과 비길 수 있을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난 인도답게 말이다.

캘커타. 인도인 친구가 내게 ‘시티 오브 조이’의 벵골어인 ‘아난 나가르’로 불리던 지역이 캘커타로 변한 연유에 대해 설명했다. 아삼지역의 울창한 나무를 벌목하는 인부가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와 같이 키 높은 나무를 날이 선 톱으로 잘라내고 있는데 생전 처음 보는 서양인이 다가왔다. 그 서양인은 이제 막 인도 정벌의 야욕에 불타는 영국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사내는 그를 향해 물었다. “Where am I?” 그는 영어를 알아들을 리가 만무했다. 자세히 보니 사내의 손가락이 어제 베어 놓은 나무더미를 가리키는 듯했다. 순간 나무를 사러 온 상인일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또 생각해 보니 사내는 “저 나무는 언제 벤 것입니까?”라고 묻는 듯했다. 그래서 그는 “꼴까타”라고 대답했다. 꼴까타는 벵골어로 “어제 베었다”라는 말이라고 한다. 사내 역시 벵갈어를 알아들을 리 없는 터라 고개를 끄덕이며 “아! 캘커타”라고 했단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재미난 얘기다. 인도와 영국의 초대면이 이런 형국이었을 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꿈을 꾸는 거대한 두 개의 나라가 만나면서 일어났던 부조화가 지금의 인도를 만든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인도가 영국의 침공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나라일까? 카스트와 종교가 굴리는 두 개의 거대한 바퀴에 실려 미궁 속을 헤매고 있을까? 아니면 그들이 가진 적지 않은 저력으로 지금보다 더욱 강대한 나라로 발전해 있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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