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민이는 지금…
광민이는 지금…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3.04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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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양지초등학교 교감
1989년, 그 해의 3월 초는 유난히도 포근하고, 젊음의 길 아래쪽 주택가 목련꽃은 너무나 희고 탐스러웠다.

3월 2일, 우리는 아이들을 학년별로 운동장 여기저기에 모아놓고 반별로 돌아가며 일년동안 함께 할 아이들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고 있었다. 반별 명렬표에 체크를 해 가며, 우리 반 아이들의 이름을 다 불러갈 때쯤 수심에 찬 한 학부모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아주 특별하게 내 시야에 다가왔다.

정광민, 천진스럽고 너무나 해맑은 웃음을 간직한 아이, 인사대신 웃음으로 항상 다가온 아이. 그 광민이는 약간의 정신지체를 갖고 있는 문자미해득아였다. 5학년이지만 자기의 이름 석자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었다. 광민이 어머니는 교실에까지 발걸음을 했었다. 그러나 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지금 내 기억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고 다만 근심어린 표정만이 지금도 선명하다.

처음, 광민이의 이름부터 시작했다. 다음은 광민이가 갖고 있는 학용품부터 글자를 익히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나는 언제나 광민이 옆에 붙어 있었다. ‘가방’, ‘가방’, ‘가방’, 글자 익히기는 수십번, 수백번, 광민이가 그 글자를 쓸 수 있을 때까지 이어졌다. 격려와 칭찬, 엄격함과 약간의 압력,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주어졌다.

기어들어가던 광민이의 목소리는 점차 커져갔다. 광민이 주변에 있는 물건들의 이름을 거의 익혀갈 즈음 일학년 국어책을 구해 지도하게 됐다. 4월을 넘기면서 이 일은 우리반 반장인 윤정이에게 넘어갔다.

윤정이는 명석하고 자애심이 많은 아이였다. 윤정이는 그 일을 자청했다. 매일매일 윤정이와 광민이의 결연학습 결과는 확인됐고 격려와 칭찬으로 이어졌다. 윤정이의 노력은 힘겹고 인내심이 필요했지만 무던히도 잘 참아냈다.

광민이도 윤정이의 이러한 헌신적 노력을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둘 사이는 정서적으로 가까워졌고 재잘재잘 이야기도 나눴다.

이러한 관계의 성립은 아마 광민이의 순수한 마음과 어색하고 미안함을 웃음으로 대신하는 광민이의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방학 때 윤정이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윤정이가 광민이 집을 방문해 광민이의 글자지도를 계속하도록 했다.

그 때 나는 청주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수시로 윤정이에게 전화를 해 지도내용을 확인하고 지도 계획을 이야기했다.

2학기가 되어서도 나의 관심은 항상 광민이에게 있었고 한 줄 한 줄 읽어 가는 광민이의 모습에 흥분해 있었다.

가을이 채 가기 전 광민이는 1학년 책을 읽을 수 있었고 5학년 교과서도 떠듬떠듬 읽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나는 광민이에게 일부러 친구들 앞에서 글을 읽게 했다.

능숙하진 않았지만 광민이가 글을 읽고 나면 반 친구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쳐줬다. 학기말이 되자 나는 수학공부와 추수지도를 위한 방안을 걱정하게 됐다. 나는 신정동 주택가에 살고 있는 광민이 집을 여러 번 방문해 상담을 하곤 했는데, 광민이 어머님의 표정은 어느 새 환한 웃음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25년의 나의 교직 생활 중 광민이는 나에게 가장 보람 있고 소중한 선물을 주었다. 광민이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사는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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