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문화의 숲
그리운 문화의 숲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4.12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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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중국으로부터 ‘삼국지’, ‘수호지’ 등의 소설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증가됨에 따라 조선 후기 서울 거리엔 소설책(이야기책)을 전문적으로 읽어 주는 강독사가 등장하였다. 이들을 ‘전기수’라 일컬었다.

19세기 후반 서울을 여행한 프랑스의 동양학자 ‘모리스 쿠랑’은 <조선문화사 서설>에서 ‘서점은 전부 도심지대에 집중돼 종각부터 남대문까지 기다란 곡선을 그리고 나아간 큰길가에 자리잡고 있다’라고 썼다. 특히 지금의 광교 주변이 오래 전부터 독서 문화가 발달한 곳임은 여러 역사적 문헌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예부터 종로 일대의 서점과 출판사는 지식인들의 갈증을 풀어 주는 회합장소이기도 하였다.

서울 중심가의 대형서점 빅3를 꼽으라면 단연 광화문 ‘교보문고’와 종각 근처의 ‘영풍문고’ 그리고 ‘반디앤루니스’를 들 수 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종로통엔 ‘종로서적’과 ‘동화서적’,‘삼일서적’, ‘양우당’ 같은 서점과 극장이 몰려 있었다. 강남이 지금처럼 번성하기 전 종로는 젊음이 넘쳐나는 거리이자 문화의 숲이었다. 특히 서점은 누구나 즐겨 이용하는 약속 장소였다. 종로서적 앞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거렸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종로는 문화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서점 역시 하나 둘 문을 닫더니 종로서적까지 셔터를 내리고 말았다. 특히 종로서적은 수 십년 동안 한국 지식인들에게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를 제공했다. 그러나 아늑한 환경과 세련된 도서목록으로 유명했던 종로서적도 이른바 미국의 ‘보더스 북앤뮤직’을 본뜬 서점 체인이 주도하는 새로운 경향을 따라가지 못해 간판을 내려야만 했다.

예부터 독서문화가 발달했던 광교에 근대적 의미의 서점이 들어선 것은 1897년의 일이다. 고제홍(高濟泓)은 옛 조흥은행 본점(현 신한은행) 남쪽에 ‘고제홍서사’란 서적상을 차렸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포목가게의 업종을 바꾼 것인데 학부에서 발행하는 각종 교과서를 위탁 판매하고 일반 출판물도 중개 판매하였다. 그 뒤 1907년 아들 고유상(高裕相)이 사업을 이으면서 상호를 ‘회동서관(匯東書館)’으로 바꾸었다. 이 무렵부터 종로 네거리 남쪽과 동쪽 방향에 덕흥서림, 동양서림, 박문서관, 영창서관 등 60여 개의 서점이 연이어 들어섰다.

고유상은 서적판매보다 출판업에 비중을 두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전기인 <화성돈전>에 이어 <철세계>, <추월색> 등을 잇따라 펴냈다. <화성돈전>은 무려 3천 부를 팔았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기면서 일부 서적은 불온사상, 과학소설이란 이유로 판금조처를 당하기도 했다. 1918년 무렵 종로지점인 광익서관, 출판사 계문사를 차리는 등 출판그룹으로 성장시켜 민족계 서점으로는 가장 큰 사세로 성장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일본서적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타격을 받기 시작했고 1926년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광수의 <재생>을 끝으로 영업을 중단한 채 판권만 유지하다가 1950년대 중반 최종 정리되었다.

근대의 첫 옥편인 <자전석요(字典釋要)>, 각종 신소설, 첫 장편소설 <무정> 등을 출간했으며 처음으로 인세를 지불하는 등 한국의 근대 출판문화를 이끌어 온 회동서관은 60여년 동안 발행한 201종의 주요 도서목록만을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최근 몇 년 동안 수도 서울의 중심부가 새롭게 탈바꿈하고 있다. ‘청계천 복원’, ‘광화문 광장 조성’ 등 시민에게 쾌적한 환경을 안겨 주며 옛 모습을 복원하는 사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숨가쁘게 진행되는 신축 또는 재개발 등의 물리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어쩌면 우린 앞서간 분들이 남긴 문화적 향기를 아예 잊고 사는 게 아닌지 한번 쯤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즐비한 서점들 간판 아래, 작가와 교사, 학생, 직장인의 물결로 넘쳐나던 그 시절 종로통의 문화적 향기가 더욱 그리워진다.

/ 김부조 시인·동서문화사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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