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된 학습보다 우연한 학습이 더 강해져서는 안된다
의도된 학습보다 우연한 학습이 더 강해져서는 안된다
  • 박문태 논설실장
  • 승인 2010.03.30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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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교사집단에서는 ‘교육목표’와 ‘교육목적’을 상식적 수준에서 구별한다. 다른 집단에서 또는 어느 독선적인 개인이 그런 구별이 뭐 필요하냐고, 더구나 그것이 무슨 상식이냐고 볼멘소리, 몰상식한 우격다짐을 부릴 수 있으나 국가가 주는 교사자격증을 갖고 있는 교사에게는 상식에 속하는 지식이다.

다음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하여 어떻게 구별 되는가 확인한다. 교육과정(敎育課程)의 틀 안에서 계획적인 행동의 변화를 시키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데에는 두 낱말이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교육목표는 ‘방향제시’와 함께 ‘거기까지 가면 된다.’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있고, 교육목적은 ‘왜 그렇게, 거기까지 가야 하나?’의 타당성에 중심내용을 둔다. 이런 개념의 차이를 놓고 보면 의도된 학습(intentional learning)은 교육목표를 먼저 정하고 거기까지 가기 위해 행해지는 교육활동, 교육적 작용이다. 이 과정에 의도하지 않은 교육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우연한 학습(incidental learning)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자면, 기독교의 십계명과 불교의 오계를 비교(compare)하고 대조(contrast)하는 의도된 학습(두 종교에 관한 이해)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아보는 교육목표가 있었는데,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면서, 즉 교육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으면서, 그것을 가르쳐주던 선생님의 복장이나 향수냄새를 기억하는 것은 우연한, 부수적인 학습의 결과인 것이다. 여기서 ‘왜 이런 공부를 해야 하느냐? 종교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개인이 망하는가? 나라가 망하는가?’의 질문에 당대의 상식적 수준에 맞게 교육과정 전문가가 답변을 하게 되면 그 답변은 교육목적에서 다루는 사항이 된다.

지난 30 여 년 동안 우리나라 초·중·고등학교의 국민보통교육 목표 중의 하나가 창의성 기르기, 의도된 학습의 시행이었다. 지금도 똑같이 강조되고 있다. 그런 교육목표를 두고 학교교육을 의도적으로 해왔으면 지금쯤 그 성과가 나타나야 하는데 공식적으로 보고 된 바가 없다. 풀이하면 이런 목표를 두고 학교교육을 시행하기 전과 30여 년 동안 시행한 뒤의 비교 연구가 없다. 이런 일을 외국에서는 ‘프로그램 평가 차원’에서 세금을 낸 국민에게 보고한다. 우리도 꼭 창의성은 아니어도 일반적 기초학력 수준의 연도별 비교를 위하여 엉성하게(이런 평가를 반대하는 국민이 있어서) 조사된 바가 있다.

창의성 기르기야 말로 국민의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전국적 수준에서 국가가 체계적으로 평가하여 다음 교육목표 설정에 기초자료를 제공해야 하는 일이다. 이런 연구에 프로파일 분석법(profile analysis)이 적용된다. 다양한 연구방법이 수행되지만 김길태 사건으로 국민의 관심(진작부터 TV 프로그램에 소개되었음)을 끌었던 ‘프로파일러’가 나오는데 그 배경은 교육평가에 있다. 사람, 업무, 사건, 과정, 사회단체, 조직 등의 주요 특색들(main features)을 요약하여 기술(記述)해놓는 일을 프로파일링이라고 한다. 특히 이들 특색에서 관심 대상의 질적인 요소들을 수량화하여 그래프로 만들어 분석한다. 한 축은 질적인 요소로 다른 한 축은 측정한 수치로 나타내어 여러 특색들이 어떤 경향, 어떤 분포를 보이고 있는지 분석한다. 사실 수사관이 즉흥적으로 이렇게 분석하기는 어렵다. 한 개인을 두고도 상당 기간에 걸쳐서 여러 종류의 자료들을 수집하여 프로파일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전문 프로파일 분석가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지난 수 십 년 동안 의도된 학습으로 창의력을 높이기 위하여 개방된 사고방식의 분위기 조성에 힘을 써왔다. 그러면서 우연한 학습으로 무질서한 행동들이 길러져버렸다. 교복이 군대식 획일화(uniform)라고 폐지되었다가 학교별로 다시 만들어졌지만 보호 받아야 할 학생의 신분까지 없어졌다. 머리에 폭풍(brain storming)이 일어나듯이 아무 생각이나 쏟아내라는 창의성 교육이 ‘야자 타임’의 시간으로 구체화 되면서 우연한 학습이 따라왔다. 즉, 기본 예의까지 없애버렸다. 아니다. 질서를 지키면서 그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한다.

/ 박문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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