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병원의 추억
울산병원의 추억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3.15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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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의 국가부도위기, 이른바 ‘IMF 사태’의 매정하고 거센 바람은 출판계에도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직원들의 월급은 이미 지급 날짜가 늦춰지기 시작했다. 회사가 당장 쓰러질 위기는 아니었으나 곧 불어 닥칠 구조조정과 불투명한 앞날에 대한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며 며칠 밤을 하얗게 지새우던 나는, 마침내 11월 어느 날 사표를 쓰고 정든 회사를 떠났다. 그날 서울 거리에는 차가운 늦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날 밤, 아내는 자신과 상의 한 마디 없이 불쑥 회사를 그만 두고 온 가장(家長)의 무책임한 행동 앞에서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그 때 큰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둘째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서울에 정착한 지 15년 만에 겪는 실직 아닌 실직의 아픔은 한 동안 삶의 의욕마저 앗아간 채 좀처럼 치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2월 하순의 어느 날, 그간 지병으로 1년 가까이 투병 중이시던 아버님이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설상가상이라고 하였던가. 그간 참아 왔던 눈물이 뜨겁게 흘러내렸다.

울산으로 향하는 심야 경부고속도로에는 연기가 깔리듯 안개비가 뿌옇게 내리고 있었다.

여느 대형 병원이 그러하듯, 울산병원 중환자실 앞 보호자 대기석도 위급한 환자 가족이나 지인들의 초조함과 긴장감으로 휩싸여 있었다.

“친구야! 오랜만이네!”

짧은 첫 면회를 마치고 나온 뒤 대기석에 멍 하니 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나의 등을 툭 치며 말을 건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중학교 동창과의 만남에 화들짝 놀라며 인사를 건넸다.

“어? 이게 누구야? 그래 참 오랜만이네. 나는 아버님 위독하시다는 연락받고 서울서 내려왔어. 그런데 너는 무슨 일로?”

그런데 나의 질문에 친구는 대답을 미룬 채 한참을 망설였다.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왜? 누가 많이 위독하신가?”

나는 친구의 부모 아니면 처가쪽 어르신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한참 만에 돌아온 친구의 대답은 힘없이 떨리고 있었다.

“내 집사람이…”

“……”

“며칠 전 딸아이 졸업식 갔다가 뇌출혈로 그만…”

“뭐라고? 어찌 그런 일이…그러면 의식은 있는 건가?”

“아니…이따가 처가 식구들 오면 산소호흡기 언제 뗄껀지…”

나는 너무 충격적인 친구의 말에 이내 침묵으로 답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튿날 오전, 끈질긴 병마와 마지막 사투를 벌이시던 아버님은 결국 이 세상과 영원한 이별을 하시고 말았다. 객지생활에서 힘들어 할 때 항상 든든한 정신적 후원자가 되어 주셨던 아버님을 막상 여의고 나니 엄청난 슬픔이 봇물 터지듯 밀려왔다. 병원 내에 빈소가 차려 지고 아버님을 떠나보내는 장례절차가 차분히 이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 이튿날 아침, 친구 아내의 빈소가 우리 빈소 옆으로 차려졌다. 25년 만에 만난 동창과 나는 각자 상주의 처지가 되어 기막힌 이별 의식을 치르게 되었다.

오늘은 아버님의 열두 번째 기일이다. 내일은 동창 아내의 기일이다.

엄마의 따뜻한 손길이 가장 필요했던 나이에 엄마를 잃었던 친구의 두 아이들은 슬픔과 시련을 잘 견뎌 내고 반듯하게 자라, 이젠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이 있기까지는 재혼의 권유를 뿌리치고 오랜 세월 독신의 외로움과 고통을 참아 내며 가정을 꾸려온 그 친구의 꿋꿋한 인내심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울산에서 오랫동안 개인택시업을 해 온 그 친구는 소외된 계층을 위한 각종 봉사활동에도 발 벗고 나선다는 훈훈한 소식을 접하고 있다.

오늘 저녁엔 그 친구에게 안부 전화를 걸어 잊지 못할 추억담이라도 나누어야겠다.

/ 김부조 시인·동서문화사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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