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의 어머니
맹자의 어머니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2.25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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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입학식을 며칠 앞두고 맹자 어머니의 가르침을 다른 관점에서 살펴본다. 잘 알려진 ‘맹모 삼천지교(孟母 三遷之敎)’의 뜻을 맹자 어머니의 본래 의도는 이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맹자 어머니가 이런 교육목적을 갖고 세 번 이사를 했다는 직접 진술이 아니어서 추측하는 것이다. 지혜가 많았던 맹자의 어머니라면 이런 뜻이었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다. 후대(유향(劉向)의 열녀전(烈女傳))에 알려진 내용을 다른 각도로 살펴보는 것이다.

맹자 어머니의 지혜로움은 맹모단기(孟母斷機), 단기지계(斷機之戒)에 잘 나타나 있다. 맹자가 공부하러 고향을 떠나 있다가 연락도 없이 집에 돌아오자 그 때 베틀에서 베를 짜던 어머니가 ‘네가 공부를 도중에 그만두고 돌아온 것은 지금 내가 짜고 있던 베의 날실을 끊어버린 것(斷機)과 같은 것이니 그러고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느냐?’로 맹자를 깨우치게 하였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한석봉 어머니가 등잔불을 끄고 떡을 썰며 한석봉의 자신의 붓글씨에 대한 섣부른 자만심을 꾸짖었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이다. 현대적 의미의 구체적 실물교육, 이런 교육방법을 알고 있었던 맹자의 어머니는 형식적 학교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지혜로서 자녀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하여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세 번 이사했다는 이야기에서 우리가 자칫 잘 못을 저지르고 있지 않나 검토해본다. 다음 해석은 노동휘(본지 ‘고함’의 집필자) 선생의 지적(2010. 2.19 점심시간의 진지한 대화)을 간추린 것이다.

세 번 이사했다는 내용의 첫 번째 동네는 묘지 가까운 곳이었다. 이는 맹자가 장례를 치루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인생의 끝’을 보아 무엇인가를 깨우치게 하려는 교육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맹자가 사람의 목숨에 관한 깨달음이 얼마만큼 이루어졌을 때, 두 번째 이사한 곳은 장터 근방이었다. 살아가는 이치를 깨우치게 하기 위한 경제교육의 체험학습장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경제에 눈이 떴을 때 비로소 사람은 짐승이 아니기 때문에 배워야 한다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세 번째 이사한 곳이 학교 근처이었다. 학문에 뜻을 두고 예의범절을 익히라는 교육목적과 평생을 두고 이 일에 정진하라는 가르침이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맹자 어머니의 자녀교육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다.

맹자가 장례 치루는 것을 보고 장례흉내 낸다고 사람 살 곳이 못 되어 이사 간 곳이 하필이면 시장 근처이고 거기서 장사치 본을 받는다고 역시 자식교육에 나쁘다고 다시 이사 간 곳이 우연하게도 학교 근처이어서 글공부를 하면서 놀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해석이다. 이런 문화적 풍토가 우리나라에까지 건너와 지금도 화장터를 마련하기가 어렵고, 기업하여 돈 번 사람을 어딘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며 돈은 더러운 것으로 여기면서도 속으로는 갈망하는 이중성을 기르게 하였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 또는 가족여행을 서울로 다녀오는 사람들 중에는 어린 자녀에게 ‘서울대학’을 구경시키면서 커서 이 대학에 가야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맹자 어머니의 자식 교육에 관한 흉내가 아니다. 오히려 중압감만 줄뿐이다.

맹모 삼천지교가 ‘본래의 학교교육의 의의’를 벗어나 좋은 학교 나쁜 학교로 확대되어 울산에서도 어느 학교가 ‘좋다 나쁘다’의 이상한 소문들이 있다. 객관적 평가기준이 없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좋다는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이 학교는 교육환경이 좋다고 그래’, 나쁘다는 학교에 입학하면 ‘이 학교에 저 녀석이 다닐 것을 생각하면 어쩐지 찝찝해’라는 말이 오고 갈 때, 물리적 환경과 더불어 교육·문화적 환경을 생각하자고 제안한다. 좋은 시설의 확충만으로 좋은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좋은 시설과 함께 가르치는 사람들의 순수하고 정직한 교육열정이 자녀교육에 바람직한 것이다. 비열한 교육자(허세부리고, A동료에게 B동료를 험담하고 다시 B동료에게 A동료를 험담하는 사람)가 있으면 그 학교는 자체정화를 통하여 좋은 학교로 만들어야 한다. 孟子가 될 아이를 盲者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제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자녀를 둔 아버지도 입학식에는 같이 가보아야 할 시대가 된 것 같다. 부모가 직장에 다니면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 학교 참관을 맡기는데 이 날만큼은 부모도 참석해야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어린 아이에게는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받는 날이기 때문에 가족들이 그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것이다.

/ 박문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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