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과 밝음사상
정월 대보름과 밝음사상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2.21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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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어두운 밤을 환하게 비춰 주는 보름달은 풍요의 상징이었다. 보름달 가운데서도 정월 대보름달과 한가위달은 특히 중시되었다. 음력 팔월 한가위가 오곡백과를 거둬들이는 추수를 즐기는 행사라면, 정월 대보름엔 새해의 풍요를 기원하는 간절함이 스며 있었다. ‘한국세시풍속(韓國歲時風俗·임동권)’에 의하면 한국에서 1년 동안 벌어지는 세시행사가 총 192건인데, 그 가운데 정월 한 달에만 102건이 집중되어 있고, 정월 중에서도 대보름을 전후하여서는 55건이 몰려 있다고 한다. 대보름달은 새해의 소원 성취와 재복(財福)을 바라는 온 백성에게 커다란 희망의 상징이었으며, 특히 농경 사회에서는 한해의 풍작과 건강을 기원하는 큰 명절이었던 것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이날은 온 집안에 등잔불을 켜 놓고 마치 섣달 그믐날처럼 밤을 새운다’라고 하였고, 지금도 일부 지방에서 ‘보름새기’를 하거나 음력 정월 14일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하는 것은 대보름을 새해의 시작으로 여긴 흔적으로 볼 수 있다.

달력이 없었던 원시사회에서도, 태양은 매일 같은 크기로 떠오르므로 어떤 것이 1월 1일의 태양인지 정확하게 구별하기 어려웠으나, 유난히 크고 둥그렇게 떠오르는 정월 보름달은 여느 보름달보다 큰 차이를 보였으므로 그 달이 일년 열두 달의 첫 번째라고 여긴 것이다.

정월 대보름날은 우리 민족의 ‘밝음사상’을 반영한 명절로 다채로운 전통 민속행사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 날을 상원(上元)이라 하는데 도교적인 명칭으로 천관(天官)이 복을 내리는 날이라 한다. 대보름은 상징적인 측면에서 달·여성·대지의 음성원리(陰性原理)에 의한 명절로, 달은 곧 물의 여신이므로 대보름과 농경문화는 밀접하였다. 땅과 달을 여성으로 여긴 것은 오랫동안 전해온 지모신(地母神)의 생산력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정월 대보름의 전통 민속행사 중 개인적인 기복 행사로는 부럼깨물기, 더위팔기, 귀밝이술마시기, 시절음식인 복쌈이나 묵은 나물먹기와 달떡을 먹는 것이 있으며, 집단의 이익을 위한 행사로는 달집태우기·줄다리기·다리밟기·고싸움·돌싸움·쥐불놀이·탈놀이·별신굿 등이 있다. 특히 개인적인 기복 행사에는 건강을 지키기 위한 옛 선현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동양에서 달은 음기(陰氣)의 상징이고, 가장 큰 달이 뜨는 정월 대보름에 그 기운은 절정에 이른다고 보았다. 견과류나 나물, 오곡밥은 음기를 보충하는 음식이었던 것이다. 또한 한해 동안 좋은 소식만 들으라고 마시는 귀밝이술(청주)도 화기(火氣)를 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데우지 않은 채로 마시고, 주술에 선의의 경쟁을 도입한 더위팔기도 역시 음기가 가장 강한 시기에 음기를 보충해 그 해의 더위를 잘 이기기 위한 풍습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고려 때부터 전승된 다리밟기(답교·踏橋)는 ‘자기 나이만큼 다리[橋]를 밟으면 그 해 다리[脚]에 병이 나지 않고 재앙을 물리쳐 복을 받는다는 민간신앙에서 유래했다. 이날 밤만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없이 밤나들이가 허락되어 다리밟기로 대성황을 이루었던 것이다. 남녀가 눈이 맞고 손이 스치길 숱하게 하여 포도청에서는 풍속을 단속하기까지 했으며, 이 보름날 밤이 상스럽다 하여 양반들은 14일 밤에, 부녀자들은 16일 밤에 다리를 밟게까지 한 기록도 전해 오고 있다.

대보름 놀이 가운데 쥐불놀이는 쥐를 쫓는다는 뜻으로 둑이나 논밭의 마른 풀에 불을 놓고, 달집태우기는 달집을 태워 그 해의 풍년을 기원한다는 뜻이 깃들어 있다. 불놀이를 통해서 구질구질한 것을 말끔히 태워버리고 개운하게 새해를 맞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며칠 뒤면, 예부터 우리 조상들이 한해의 풍작과 건강을 기원하며 명절로 지내 오던 정월 대보름이다. 사라진 유형문화재들의 복원도 중요하지만 차츰 빛을 잃어 가는 세시민속을 되살리고 꾸준히 지켜 나가는 것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도리요, 의무가 아닐까.

/ 김부조 시인·동서문화사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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