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닿는 곳 마다 서려있는 100년 고래잡이 역사
발길 닿는 곳 마다 서려있는 100년 고래잡이 역사
  • 김준형 기자
  • 승인 2010.02.05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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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 고래해체장·풍어 기원하던 제당
골목골목 남아있는 70~80년대 정취 물씬

‘장생포고래길’은 근·현대 고래잡이 역사를 간직한 길이다. 장생포 포구를 따라 난 이 해안길은 100년이 넘도록 그 역할을 다했다. 장생포는 1899년 러시아의 포경전진기지 설치 이후 1986년 상업포경이 금지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최초·최대 고래도시로서의 전성기를 누렸다.

지금은 비록 쇠퇴했지만 장생포초등학교에서부터 해안을 따라 고래박물관을 거쳐 울산지방해양항만청까지의 2km에 걸쳐 즐비한 고래고기집들이 옛 영화를 말해준다. 집집마다 ‘고래’란 글귀가 보일 정도다.

지금도 선박이 가득 들어선 포구와 십수곳에 이르는 고래고기집들이 그럴싸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또 포경이 금지되면서 개발이 멈춘 탓에 골목골목에 남아있는 70~80년대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점도 장생포의 또 다른 볼거리다.

제 기능을 잃은 고래해체장과, 고래를 삶던 ‘고래막’의 어렴풋한 흔적도 이 길에서 찾을 수 있다. 장생포만 너머의 한진중공업 부지 내(당시 유안마을)에는 ‘장생포 고래해체장’ 건물 5동이 반파상태로 남아있다. 1961년 지어져 1985년까지 사용된 이 해체장은 한국포경어업수산조합이 당시 고래해체시설을 보유하지 못했던 포경업자들을 위해 운영한 시설이다.

비슷한 시기 전국 여러 곳에 있었으나 유일하게 모습이 보존돼 있는 곳이다. 제유장, 고래고기 임시보관고 등이 남아있고 일부 시설은 장생포 고래박물관에 옮겨져 전시돼 있다.

고래고기를 삶아내던 고래막은 크게 4곳 정도 있었다. 해경부두와 울산세관 통선장 사이 낡은 양철판 지붕이 덮인 길다란 형태의 건물이 대표적인 고래막이었다. 현재 내부 시설물은 대부분 사라졌고 건물은 다른 영업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인근에 2곳의 고래막이 위치했고, 현 장생포우체국 옆에도 있었다고 한다.

해안도로에서 벗어나 울산세관 통선장 맞은 편 골목으로 들어서면 장생포 제당과 당산나무를 마주하게 된다. 제당은 신주당이라고도 불리는데 약 100년 전 주민들이 건립했다고 한다. 초기에는 죽도에 있었으나 해안 매립으로 인해 현 위치로 옮겨졌다.

장생포 주민들은 배가 출항하는 시기인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신주당에 모여 당산제를 지냈고 음력 10월 5일에는 풍경제를 지냈다. 제당 뒤쪽에는 당산나무인 수령 150년 된 팽나무가 있는데 포경 선주들이 첫 고래를 잡으면 이 나무에 고래꼬리를 매달아 풍어를 기원했다. 원래 두 그루가 있었으나 1987년 태풍 셀마로 인해 큰 나무가 죽고 한 그루만 남았다.

제당 뒤 언덕 위의 밭에는 신명신사 터가 남아있다. 1927년 일본인에 의해 축조된 이 신사는 하단부 일부와 꼭대기 층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원기둥만이 남아있다.

또 제당에서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우짠샘’이라 불리는 우물이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장생포 주민들의 주요 식수원이었던 이 우물의 물은 포경선이 출항할 때도 배에 싣고 갔다고 전해진다.

[장생포와 40여년 함께한 최영해씨]

고래잡이는 장생포 사람들의 생업이자 축복

“힘차게 울리는 세 번의 뱃고동 소리는 고래를 잡고 돌아왔다는 의미였지요. 뱃고동 길이에 따라 잡은 고래 종류가 달랐습니다. 밍크고래처럼 작은 고래는 짧게, 참고래 이상의 큰 고래는 길게 세 번 울렸죠. 참 듣기 좋은 소리였습니다.”

1969년부터 공직생활을 하면서 장생포와 인연을 맺은 뒤 현재 고래고기집을 운영하는 최영해씨(70·사진)는 당시를 회상했다.

“십수척의 포경선이 장생포에서 활동했는데 큰 고래를 잡은 날은 동네 사람들이 모두 부두로 모였고 집채보다 큰 고래를 해체하는 과정을 구경하곤 했지요. 해안에 바지선을 띄워 놓고 해체하기도 했습니다. 고래고기는 장생포에서 소비했지만, 화물차에 실려 지금의 장생포고래길을 따라서 부산 등지에 팔리기도 했습니다. 고래를 잡고 해체하고 삶아서 먹고 팔고 하는 것 자체가 장생포 사람들의 생업이었고 축복이자 축제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장생포는 고래잡이가 전부였지요.”

최씨는 말을 이어나갔다. “당시 고래가 많이 잡히면서 장생포는 울산에서 가장 부자 동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배를 타려는 선원들이 각지에서 모였습니다. ‘장생포에서는 개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도 이 때문에 나왔습니다. 쉽게 말해 지금은 1천500명이 채 되지 않는 장생포 인구가 70~80년대에는 장생포초등학교의 학생 수만 해도 이를 넘었으니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되겠지요. 장생포초등학교에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야구부가 있었고 롯데자이언츠의 윤학길 선수(현 LG트윈스 투수코치)가 이 학교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최근 장생포의 실정에 대해 “상업포경이 금지되면서 이후 20년간 장생포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어 인구도 많이 줄었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며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옛 풍경이 많이 남을 수 있었고 이를 다시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도 있게 되면서 최근 들어 조금씩 관광객들은 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고래 자원을 바탕으로 장생포가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길 기대합니다”라고 덧붙였다.

/ 글=김준형 기자
/ 사진=최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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