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을 아십니까?
웰다잉을 아십니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1.18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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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조문(弔問)차 울산에 다녀왔다. 작년 8월 조문에 이어 두 번째 고향 나들이(?)였다. 최근 들어 부쩍 어르신들이 세상을 뜨셨다는 비보(悲報)가 잦다. 이제 필자의 나이도 50대 중반에 가까워지니 동창들의 부모님이나 고향 친척 어른신들의 연세가 높아 부음(訃音)를 자주 접하게 된다. 자연의 섭리요 하늘이 하시는 일이지만 슬픔에 잠긴 유족의 입장에서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조문을 마치고 나면 유족과 주로 나누는 대화가 돌아가신 분에 대한 투병과정과 기간, 그리고 임종시의 상황 등이다. 이때 주된 관심사는 투병기간이다. 높은 연세에 한 달 정도 앓다 가셨다고 하면 ‘호상(好喪)이구나’ 하며 다소 편한 표정을 지을 수 있지만 치매나 중증으로 오랜 기간 투병 끝에 고통스럽게 가셨다고 하면 왠지 마음이 무겁다.

 지난해 2월, 서울신문은 1면 상자기사 <세대초월 ‘웰다잉(well-dying)’ 바람>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善終)이 ‘웰다잉’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내용을 전하며 “아름답게 생을 마무리한 추기경의 모습에서 ‘웰빙(well-being)’만 좇던 우리시대 사람들이 인생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게 된 것”이라고 풀이했다.

 유서쓰기, 입관체험, 자서전 집필, 나눔알기 등 ‘웰다잉’을 체험하는 기관들에는 문의 전화가 급증하고 있고 서울시립노원노인종합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죽음준비학교’는 3월 중순 개강이지만 이미 20명 모집인원 중 절반이나 찼다고 전했다.

 불교에서는 앉거나 선 자세로 열반(涅槃)하는 것을 좌탈입망(坐脫立亡/坐脫入忘)이라 이른다. 죽음을,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한 최고의 경지인 열반으로 보는 것이다. 곧, 죽음은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번뇌가 없어지는 적멸(寂滅)의 순간인 동시에 법신(法身:영원한 몸)이 탄생하는 순간이므로 예부터 선사나 고승들은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찾아오는 죽음의 순간을 맞을 때도 일반인들처럼 누워 죽는 경우, 또는 자신의 몸을 불태워 소신공양(燒身供養)하거나, 앉거나 선 채로 죽는 경우 등 죽음의 형식도 다양하였다.

 이 가운데 앉거나 선 채로 열반하는 것이 바로 좌탈입망이다. 보통 법력(法力)이 높은 고승들이 죽을 때 주로 택하는 방법으로, 죽음마저도 마음대로 다룬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선가(禪家)에서 좌탈을 중시하는 이유는 마지막 죽는 순간의 의식 상태가 다음 환생(還生)과 관련된다고 보는 사생관(死生觀) 때문이다. 좌탈을 했다는 것은 각성(覺醒) 상태에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뜻하고, 이 상태가 다음에 태어날 때의 의식수준이나 육체적 조건을 결정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공포와 혼돈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그 상태가 이월되어서 환생할 때에도 비각성(非覺醒) 상태이지만, 죽음을 바라보면서 죽는 죽음은 환생할 때 각성 상태가 된다는 말이다. 마지막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비록 특정 종교에서 보는 죽음에 관한 관점이지만 해석하기에 따라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도 있다. 

 기대수명이 갈수록 늘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가 노령화 되었을 때 노인인구는 더욱더 늘어나고 기대수명 또한 더 늘어날 것이다. 오래 살면서 건강하게 살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을 경우 오래 사는 것 자체가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산소 호흡기에 의지하여 의식불명인 상태로 죽음을 맞을 것인가 아니면 의식이 또렷한 상태에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 할 것인가는 어쩌면 자신의 생활습관이나 마음다스리기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 이왕이면 품위 있게 잘 죽는 것도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요즘 붐이 일고 있는 '웰다잉'에도 관심을 기울여 봄직하다.
 '웰다잉'이 바로 ‘웰빙’인 것이다. ‘웰다잉’ 하려면 평소에 꾸준한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잘 죽는 연습이다. 그것은 바로 엄격한 ‘자기관리’가 아닐까.

김부조(시인·동서문화사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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