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정체성은 반구대 암각화
울산의 정체성은 반구대 암각화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1.14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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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만난 공공기관 인사에게 “울산의 정체성을 어디서 찾는 게 좋겠느냐” 고 묻자 그는 지체없이 반구대 암각화라고 했다. 울산에 온지 채 2년도 안된 사람에게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늘 머릿속 한 구석에 감춰져 있던 뭔가가 튀어 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어머니를 떠나 객지에 온 사람이 우연찮은 순간에 다시 어머니의 존재를 느끼듯이 그 사람의 말속에서 평범한 ‘울산의 공통분모’를 발견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일부에게만 소유되지 않으면서도 그 곳에만 있는 것, 또 구태여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자랑스러운 것, 그리고 모두가 그 앞에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울산사람들에게 필요했는데 우리는 그 동안 너무 먼 곳에서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래는 토착민들에게만 익숙하고 외지에서 살러 온 사람들에겐 낯설다. 그래서 모두에게 그 축제에 뛰어들자고 종용하기엔 뭔가 어쭙잖은 점이 많다. 처용은 세인(世人)들이 지나치게 덧칠을 많이 했다. 또 장황하게 설명해야 사람들이 알아들을 정도로 처용은 먼 거리에 있다. 추상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남에게 우쭐대긴 곤란하다. 학(鶴)은 이곳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전국적으로 학에 얽힌 설화, 전설이 많아 울산만 상징하기엔 희귀성이 떨어진다.
 반구대는 행정구역상 울산시 소속일 뿐  그 계곡에 들어서는 순간 지역의식이 없어진다. 먼 선사시대의 바위 동산을 좇아 들어가는 듯한 ‘초 지역주의’에 젖게 한다. 그래서 그곳에 가면 모두 뭔가 모를 향수를 느낄 수 있다. 구획을 나누거나 분당(分黨)을 짓지 않았던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암각화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인간끼리의 동질감(同質感)을 충분히 맛보게 한다. 그 곳엔 계급도 없고 빈부가 주는 쓰라림도 없으며 단지 삶을 영위하는 순수한 모습만 보인다. 반나(半裸) 상태로 노를 저어 바다로 나갔을 그들에게서 지역 색깔이나 사상, 또는 이념적 갈등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 모두가 똑 같은 인간임을 다시 확인하고 우리가 잠시 안도할 수 있게 해 준다. 보잘것없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서는 그들의 모습에서 현실을 배울 수도 있다. 거친 파도를 헤치며 허술한 장비로 고래를 잡아 삶을 꾸려야 했던 당시를 상상하면 오늘을 사는 우리가 결코 불행한 것만은 아님을 깨닫게 해준다. 조그만 배에 6,7 명이 타고 있는 모습이 바위 위에 선명히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고래잡이에 나선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 아니라 도전과 협동의 의미를 일깨우는 정신을 전하는 암각화다. 동시에 그 것은 울산의 과거, 현재, 미래다. 울산을 60년대 공업화 이후로만 못 박는 시간개념을 거부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이기도 하다. 울산은 이미  선사시대 때부터 지금의 번영과 협동 그리고 도전 정신이 예고 돼 있었다는 물증이다. 이렇게 고대에서부터 삼국시대, 고려를 거쳐 조선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울산은 역경을 헤치며 살아온 인간들의 삶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이쯤에서 반구대 암각화를 울산의 상징이라고 한다면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이 반구대 암각화만큼 우리 모두에게 소리 없이 다가와 뿌듯한 일체감을 줄 수 있는 상징물은 없다. 그래서 그 숱한 이질적 요소들을 모조리 녹여 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울산의 정체성은 고래도, 처용도, 학도 아닌 바로 반구대 암각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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