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따라 만들어진 길, 그 물밑에 또다른 길…
물 따라 만들어진 길, 그 물밑에 또다른 길…
  • 김준형 기자
  • 승인 2009.12.24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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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용수공급 위해 만든 선암저수지에 마을 수몰

물을 따라 만들어진 길, 그 물밑에도 길이 있었다. 선암호수공원(선암수변공원)은 현재와 과거를 함께 간직한 오묘함이 숨어있다.

수변을 따라 산책길이 조성되면서 공원이 된 선암저수지는 1964년 울산 공업단지에 용수 공급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때 번성했던 마을 세 곳이 수몰됐다. 특히 길이 거미줄처럼 연결돼 교통의 요충지였다는 전언이 흥미롭다. 크게 여섯 갈래가 있었고 대현면(삼산, 신정 등 일부를 제외한 현 남구지역)에서 가장 큰 장터였던 ‘고사리장(고살장·현재는 사라졌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공원 정문의 관리동과 꽃단지가 위치한 곳에는 50여 가구가 살던 ‘대리마을’이 있었다. 선암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라 해서 ‘선암본동’이라고도 했고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이주한 선암동주민센터 인근이 같은 명칭으로 불린다. 마을 옆으로 난 길(현 공원 정문길)로 넘어가면 야음이 나왔다.

정문에서 댐 반대쪽 산책로를 따라가다 소공연장 앞 주차장 옆으로 ‘새골(혹은 골새)’이라 불리던 골짜기가 나온다. 수암으로 가는 이 골짜기에 난 길은 포장길이지만 300m 정도 옛 형태가 어렴풋이 남아있다. 지금도 수암동 사람들이 선암저수지로 오는 산책로로 이용한다.

수암으로 넘는 길은 ‘구북이고개(개가 엎드린 모양이라는 뜻)’, ‘귀배기고개(거북이가 엎드린 모양)’도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모두 사라졌다.

여기서 소공연장을 지나면 저수지 한가운데 ‘발음산’이라 불리는 봉우리가 보이고 이어 물레방아와 연꽃지를 만나게 된다. 오른편에는 배 모양의 공원 화장실이 있는데 이 일대가 꽃바우(화암)마을이었다.

계속 도로를 따라 생태습지원을 지나면 오른편에 나지막하고 소나무가 울창한 샛길이 나온다. 200m 정도가 남아있고 그나마 옛 모습이 뚜렷한 길로 ‘대날고개’라고 불렸다. ‘대나리마을(현 두왕로 입구의 한국카프로락탐 사택)’을 지나 ‘갈티마을(혹은 갈현·현 옥동)’까지 이어졌다 한다. 고개를 넘기 전 골짜기를 ‘허재비박골(허재밥골)’이라 한다.

이곳에서 생태습지원을 뒤로 하고 수변을 따라 10분정도 걸어가면 꽃창포쉼터가 있는 골짜기에 다다른다. 이곳은 서당이 있어 ‘서당골’라 했고 뒤로는 상개 방면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었다. 근처에 봇짐장수들이 쉬었다 간 ‘선암주막’과 조선시대 도자기를 구웠던 가마터도 있었다고도 전해지지만 지금은 물에 잠겼다.

다시 10여분을 걸어오면 댐이 나온다. 이 자리에 13가구 정도가 살던 ‘새터마을(신기)’이 있었다. 마을에는 천석꾼이 살았고 ‘밀개등’이라 불리던 앞산의 정상에는 현재 댐 전망대가 있다.

이 마을 앞(현재 댐 아래)으로는 두 길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청량 방향이고 다른 길은 걸어서 10분 거리의 ‘고사리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새터마을 살던 심응보씨

고사리장이 열리던 날은 사람왕래 끊이지 않았죠

“고사리장이 열리던 1일과 6일은 새터마을 앞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수암, 야음, 상개, 갈티(옥동) 사람 모두 지금의 선암저수지를 지나야 했지요”

새터마을에서 살다 댐이 생기면서 마을을 떠난 심응보(74·사진 왼쪽)씨는 그 때를 회상했다.

심씨는 “원래는 고사리에서 장이 섰는데(현 SK울산공장 편입) 1948년에 지금의 울산자동차검사소 인근에 여천동의 산업조합이 개장되면서 자리를 옮겼지만 그대로 고사리장이라 했고 조합장이라고도 불렀습니다”라며 “당시 고사리장은 소비가 많은 시장, 즉 살려는 사람이 많은 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울산장 다음으로 대현면에서 물건이 많이 모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심씨는 이어 “장생포의 고래고기와 수산물, 여천의 울산배, 야음의 수박과 참외, 마채(현 청량 인근)의 소금, 돋질의 조개, 부곡의 토마토, 삼산의 쌀 등 각종 농수산물이 모두 모였지요”라며 “특히 울산배(현재 삼남면에서 재배)는 전국에서도 유명해 팔월 끝에는(추석 무렵) 시골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배를 사려고 새터마을 앞을 지나던 행렬이 몇날 몇일 이어졌습니다”라고 덧붙였다.

50년 대 당시 고사리장은 번성해 여러 곳의 주막과 이발소, 사진관, 자장면집이 있었으며 가설극장도 열려 흘러나오는 노랫가락은 젊은 남녀들을 설레게 했다고 전해진다. 또 울산에서 유일하게 마차를 수리하고 말발굽에 쇠 징을 박아주는 곳이 있기도 했다.

심씨는 “선암호수공원 내에 있는 허재비박골은 고사리장에서 물건을 팔고 술을 먹고 넘어가다 허재비(허수아비라는 뜻이나 허상을 말함)를 자주 본다고 해 붙여진 지명이죠”라며 “헛것을 본 취객들이 혼비백산해서 실신하기도 하고 허둥대다 길옆에 있던 옹달샘에 빠지기도 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선암호수공원에서 심응보씨와 인터뷰를 하던 중 우연하게 대리마을에 살다 수몰되면서 떠났던 정복선(82·여·사진 오른쪽)씨를 만났다. 심씨가 살던 새터마을의 뒷마을 사람이었다. 한참을 보더니 서로를 알아보곤 함께 옛 얘기를 풀었다.

정씨는 “17살 때 언양 쪽에서 대리마을로 시집와서 쭉 살았지요”라며 “마을이 있던 이 공원을 종종 찾는데 45년 전 기억이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라며 옛 추억을 되새겼다.

/ 글=김준형 기자·사진=최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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