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소설과 소설정치
정치소설과 소설정치
  • 김정주 기자
  • 승인 2009.12.23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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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인데도 지역신문의 정치면이 뜨겁다. 올 연말은 특히 더 그래 보인다. 전국동시 지방선거가 반년도 채 안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의 계절이 동장군과 함께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정치계절풍이 불어 닥치면 정치부 기자는 소설가의 외투를 껴입는다. 소중하게 간수해 둔 정치인맥의 수첩을 끄집어내고 그 위에 작가적 상상력을 끼얹으면 그럴 듯한 흥밋거리 소설 한 편이 태어난다. 작가적 상상력에다 동물적 정치감각까지 가미한다면 베스트셀러로 가는 지름길을 낼 수가 있다. 그것이 비록 삼류소설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삼류인지 아닌지를 식별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얼마 안 가서 들통 나는 한이 있더라도 정치부 기자는 소설의 등급에 연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반짝 세일’에 탐닉하려는 속성을 지녀서인지도 모른다.

정치소설의 표지를 그럴 듯하게 포장해 내는 정치부 기자에 대한 기억을 독자들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의 활보 무대가 중앙정치의 언저리라면 그 포장은 더더욱 그럴싸해 보이기 마련이다. 한쪽 신문이 먼저 치고 나가면 다른 신문은 한 술 더 뜬 포장으로 응수하기도 한다. 섣부른 경쟁 심리가 빚어내는 만화경이라 하더라도 애써 눈감아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그래서 곧잘 등장하는 용어가 ‘자천 타천’이다. 당사자는 김칫국만 마시고 있는데도 소설은 떡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았노라, 눈을 속이거나 허풍을 떨기도 한다. 이런 경우 ‘타천’의 주체는 소설을 쓴 기자 본인일 때가 더 많다.

진열장이란 구색의 종류가 많을수록 시선이 더 쏠리는 법이니까.

하지만 정치소설은 나름대로의 묘미가 있다. 그 약발이 일부 독자들에게는 매우 강하고 오래 가는 탓이다. 정치지망생이라면 그 약효가 훨씬 더 강하다. 이런 경우 ‘자천’이 고개를 내민다. 기초단체장이 꿈이지만 이왕이면 광역단체장 후보군에 끼워주기를 고대한다. 필시 ‘밑져봐야 본전’ 그 이상의 심리적 만족이 뒤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어느 고위 인사가 단체장 후보로 지목될 것이라는 소문이 잠시 나돌았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타천’이라 했지만 당사자는 ‘들러리 서기’를 용기 있게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한 고위 인사는 ‘자천’으로 단체장 후보를 자원한 끝에 임기 1년을 앞두고 서둘러 옷을 벗기도 했다. 이 무렵 지면에 반영된 정치소설은 작가적 상상력이 굳이 필요치 않은 경우였고, 두 경우 모두 본인들에게는 무척 기분 좋은 일이었을 것이라는 후문이다.

“소설 창작의 두 가지 기본요소에 ‘재료적 요소(factual elements)’와 ‘기술적 요소(technical elements)’가 있다. … 이들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요소는 인물(character)과 시점(視點, point of view)이다.”

소설과 정치 사이에는 ‘창작’이란 공통점이 존재한다. 소설 창작의 정의에 ‘정치’를 대입시킨다면? 흥미로운 결과를 만날 수도 있다. “정치는 어차피 소설 아닌가?”

2009년 한 해를 돌이켜 보면 소설 같은 정치적 사건들이 숱하게 생겨나고 사라졌었다. ‘소설 같은 정치’를 ‘소설정치’로도 부르고 싶을 정도로….

경인년(庚寅年), 선거의 새해가 밝으면…? 간절곶을 비롯한 구와 군의 해맞이 행사에는 수많은 정치지망생들이 앞 다투어 얼굴 알리기에 나설 것이고, 정치부 기자들의 정치소설 또한 제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새해 꼭두새벽 울산 앞바다에 오메가(?) 모양새로 떠오를 대망의 새해를 바라보며 그들은 과연 어떤 소망을 담아 소지를 날려 보낼 것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혹시나 이런 기원은 아닐는지?

“정치소설을 쓰더라도 일류를 지향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소서! 그리하여 유권자들이 올바른 판단의 잣대로 제대로 된 인물, 소설정치를 지양하며 국리민복에 매진할 인물을 고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김정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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