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8년 7급 공채로 경남 의령군 내무과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울산광역시 최병권 경제통상실장이 울산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94년 울산 동구청 사회산업 과장으로 전보되면서부터다. 81년 의령에서 김해로 전근된 뒤 91년 경남도청 도시국 주택과에 근무하다 사무관으로 승진해 92년 경남 고성 부 읍장으로 자리를 옮긴지 2년 만에 울산으로 왔다. 97년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될 당시 서기관으로 승진해 기업지원과장, 2004년 부 이사관이 되면서 문화체육국장, 자치행정국장을 역임했다. 2008년 이사관으로 승진하면서 경제통상실장을 맡았다. 최 실장은 오는 11월 30일 공식적인 업무를 마감하고 12월 4일 이임식을 갖는다. 편집자주
최병권 실장은 골프를 못 친다. 이유를 묻자 “칠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그의 이력을 보면 애당초 골프와 거리가 먼 사람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최실장의 별명은 ‘준비 총괄반장’이다. 김해읍이 시로 승격되던 81년도에 준비요원으로 차출된 이래 97년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될 때도 당시 심완구 시장의 지시에 따라 준비 총괄반장을 맡았다.
-김해읍 근무 당시 왜 하필이면 최 실장을 시 승격 준비 반장으로 뽑았을까요.
(장난 끼 있게 웃으면서) 일 좀 잘한다고요. 대신 약 1년 동안 준비하면서 반 쯤 죽었습니다.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었는데 자정에 가까워서 집에 가는 일이 비일비재 했죠. 아예 집에 못 들어가는 경우도 허다했고요. 가정에는 빵점 아버지, 남편이었습니다.
-그럴 때 집에 계시는 분이 아무 말씀도 안 했습니까.
이 질문에 인터뷰 첫 머리부터 활기 있게 이야기를 늘어놓던 최 실장이 잠시 말을 멈추며 약간 침울해졌다.
“사실 고인(故人)에겐 지금도 미안 합니다. 한 마디 불평도 없었습니다. 시 승격 준비작업을 하느라 밤늦게 까지 근무하고 있으면 읍사무소 앞마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기다리곤 했죠. 일을 마치고 애들과 웃으며 집으로 가던 생각이 납니다. 극장에 데리고 가 영화 한편 제대로 못 보여주고 떠나보냈습니다”
최병권 실장은 김해에서 공직을 시작한지 6년째 되던 1986년 암으로 투병하던 부인과 사별했다. 그는 공직 생활 31년 중 그 때가 가장 괴롭고 고독한 시기였다고 술회한다. 현 부인과는 87년 재혼했다. 사별한 전 부인은 고향인 경주에 안장돼 있다.
“지금 집 사람과 결혼하면서 서로 약속했습니다. 자식은 갖지 말자고 말입니다. 이미 아이들이 있는데 또 자식을 낳아 갈등을 빚는 가정들을 본적이 있거든요. 처녀 몸으로 결혼하면서도 제안에 흔쾌히 동의한 집 사람의 착한 마음을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일부에서 집 사람을 두고 ‘부적절한 관계’ 운운할 땐 몹시 서운합니다. 애들 엄마에게 미안하기도 하고요”
‘일만 죽으라고 하느라’ 골프 못 쳤다는 최병권 실장에게 공무원을 시작한 동기가 뭐였느냐고 묻자 또 사별한 전 부인 얘기가 나왔다. “ 공무원이 되기 전에 기업체에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집 사람이 이왕 월급쟁이 하려면 공무원을 하라고 권유했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 좀 늦은 나이(28세)에 공직을 시작했습니다”
-경제통상실장으로 있으면서 했던 일 중 가장 보람되게 느끼는 부분은.
삼성SDI 부지에 삼성 리모티브 2차 전지공장을 건설토록 유치한 일입니다. 5천억을 투자해 공장을 건설했습니다. 앞으로 4천5백억원을 더 투자할 예정이랍디다. 이 공장이 완공되면 울주군 상북, 삼남, 언양 일대에 엄청난 경제 활성화가 있을 겁니다. 많은 지역민들이 고용되는 것은 물론이고요. 일이 성사되고 난 뒤 삼성SDI 사장이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울산광역시 공무원의 열정에 감동해 공장건설을 울산 쪽으로 결정했다더군요. 그 공장유치를 위해 경기도 및 수원시가 우리와 팽팽한 접전을 벌였거든요.
-자유무역지역 지정에도 실무를 담당했다는데요.
일이란 게 원래 그렇잖습니까. 대강적인 윤곽이 잡히면 구체적인 실무로 접근하게 되는데 그게 윤곽잡기보다 수십 배는 더 힘들어요. 자유무역지역 지정도 마찬가집니다. 사업유치는 지역정치권과 울산시가 했지만 구체적 조율은 통상경제실에서 했습니다. 국비 70% 지원을 확보키 위해 지식경제부에 수십 차례 들락거렸습니다. 산업단지 조성이 시작돼 현재 공정율이 35%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지역이 국비지원을 받아 사업이 완료되면 울산시와 온산지역 주민들의 소득향상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겁니다.
-대우차 이전 문제는 어떻습니까.
이 부분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북면으로 이전해 오는 것은 대우버스입니다. 대우차가 아닙니다. 내년 말까지 이전이 완료됩니다. 일부에서 이의를 제기한 적도 있습니다만 확실히 옮겨 옵니다. 대우차 측과 여러 번 만나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최 일벌레‘는 동북아 오일허브 유치를 위해 실무전선에서 뛴 것을 경제통상실장 재임 기간 중 최대의 업적으로 꼽았다. 또 이 사업은 반드시 국비지원을 받아야 민자유치가 가능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도 했다. 이 부분에 와서 최 실장은 일부 숨겨진 이야기도 털어 놨다.
-동북아 오일허브를 울산에 구축키 위해서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
우선 이 사업은 울산을 향 후 수십 년 간 ‘먹여 살릴 수 있는 대역사(大役事’)임을 알아야 합니다. 온양, 온산 지역발전과 경제활성화에 기여하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요. 당초 이 사업은 지난 정권 때 여수로 확정돼 있던 일이예요. 지역 정치권이 앞 장 서고 우리가 실무차원에서 모든 일을 추진했습니다. 지정 확정을 미적거리는 KDI와 지식경제부에 논리적 설득으로 접근했습니다. 직접 방문해 울산의 장점을 수차례 설명했습니다. 여수의 약점을 간파해 역공을 펼치기도 했죠. 그 쪽은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항구 이용에 시간적 제약을 받지만 울산신항은 24시간 ‘풀’가동 할 수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최병권 실장이 2004년 문화체육국장으로 있을 때 태화강 생태하천 조성 사업이 시작됐다. 마침 박맹우 시장이 구상하던 태화강 살리기 사업과 그 시기가 맞물려 떨어져 최 일선에서 생태복원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생태복원 사업에 대한 구상을 갖게 된 동기는.
제1회 태화강 수영대회를 개최하면서 부텁니다. 강물이 오염돼 엉망이었거든요. 태화강 수질이 좋지 않아 환경단체, 언론, 의회까지 수영대회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8월 대회를 앞두고 3월부터 강 수질 개선에 나섰습니다. 그 것이 시장님의 태화강 생태복원 작업‘ 하이라이트’로 연결됐다고 생각합니다. 태화강 관리단이 설치된 것도 그때부텁니다. 울산에 ‘생태도시’란 이름이 등장한 것도 그 무렵이고요. 지금 그 강이 4대강 살리기의 시범사업으로 선정돼 있잖습니까.
최 실장이 남긴 추진 사업들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법적인 대응까지 불사하면서 밀어붙인 태화루 복원 사업, 태화강을 생태하천으로 한 단계 상승시킨 ‘용선(龍船) 대회’ 박물관 불모지란 오명을 벗기 위해 시도한 시립 박물관 착공, 대곡박물관 및 암각화 박물관 개관 등이 그의 손길을 거쳐 태생해 움직이고 있다. / 글 = 정종식 기자
/ 사진 = 정동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