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절 최대 산업로, 지금은 잊혀진지 아득
한시절 최대 산업로, 지금은 잊혀진지 아득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9.11.19 20: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鐵실은 우마차 줄지어 넘어 녹동·언양 닿아울산 북구 달천마을에서 범서읍 척과리 왕걸마을을 이어주는 나즈막한 고개가 있다. 이 고갯길은 한때 가장 중요한 산업로였다. 달

천철장에서 철 재료를 담아 연료가 풍부한 녹동과 언양·청도로 실어나르던 길이었다. 줄잡아 1천년은 넘어선 오래된 길이다.

고대로 부터 철을 생산한 달천철장은 한동안 잊혀졌다가 조선시대인 1657년(효종8년) 두서면 전읍리 사람인 구충당 이의립(李義立)에 의해 재발견돼 재2의 전성기를 맞게 됐다.

이 당시 철과 철기구를 만드는 곳을 쇠부리터라 불렀다. 달천 토철을 원료로 하는 쇠부리터는 가까운 경주 외동읍 녹동리(덧거리)에서부터 멀리는 청도에까지 이르렀다.

바로 달천철장에서 녹동과 청도까지 쇠를 나르는 짐꾼들이 만나는 첫 관문이 지금의 진덕고개다. 달천마을 촌로들의 말에 의하면,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척과사람들이 토철을 지고 진덕골로 넘어 갔다고 했다.

고열로 철광석을 녹여야 하는 작업의 특성상 숯 중에서도 참숯이 가장 좋은 재료가 되기 때문에 이를 쫓아 진덕골을 넘어 참나무가 많은 녹동과 언양, 청도 등의 쇠부리터로 이어졌다. 진덕고개는 해발고도가 낮고 골짜기가 완만하여 등짐을 지고 가기에 큰 무리가 없는 고개이지만 워낙 무거운 철이다 보니 달천광산 토철을 운반하는 과정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주로 사람과 소가 등짐을 지고 날랐는데 고개를 넘는 시간도 짧게는 하루만에 끝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행렬이 길고 사람과 소가 많이 동원될 경우는 이틀에서 사흘씩 걸리기도 했다.

지금은 진덕골 주민들의 논밭이 산재한 고개 중턱까지는 차량 한대가 지나다닐 넓이로 콘크리트 포장돼 과거의 정취가 사라졌지만 중턱 이후부터 정상을 지나 다시 내리막길 중턱까지는 우마차가 넉넉히 다닐 수 있는 비교적 넓은 산길로 이어졌다.

비포장 산길로 접어들면 비록 높지 않은 산이지만 울창한 산림에 햇빛이 가려져 마치 터널을 걷는 느낌을 주고 있으며, 떨어진 가을 낙엽들이 쌓여 걸을 때 사박사박하는 소리와 함께 발바닥에 포근함이 전해온다. 아마 당시 이 고개를 지나던 짐꾼들도 발바닥에 전해오는 포근함에 무거운 쇠를 등에 지고 다니는 고단함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고개 정상부로 갈수록 소나무와 떡갈나무, 참나무 등 사람의 손때를 타지 않은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다.

고개를 넘으면 척과리 왕걸마을 옆 해룡골로 내려오고, 여기서 경주 녹동마을과 척과리 반용마을 방향으로 길이 나뉜다.

달천철장에서 쇠를 지고 넘어온 짐꾼들은 왕걸마을 주막에서 막걸리로 가볍게 목을 축이면서 휴식을 취한 뒤 일부는 당시 이 일대 최대의 쇠부리터가 위치한 녹동으로 향했을 것이다. 달천철장과 12km 떨어진 녹동 쇠부리터는 울산 인근 120여개의 쇠부리터 흔적 가운데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돌을 마치 성벽처럼 3m 높이로 차곡차곡 쌓은 조선시대 용광로다.

녹동저수지 끝에서 작은 산길로 접어들어 약 100m쯤 나무가지를 헤치고 가다보면 과거 경주의 경계였던 관문성 석축이 나타난다. 바로 그 뒤 숲속에 녹동 쇠부리터가 있다.

녹동 쇠부리터는 달천의 철광석과 인근 치술령에서 숯을 충분히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큰 용광로를 쓸 수 있었다. 나머지 짐꾼들은 척과 방향으로 길을 잡은 뒤 반용마을에서 가파른 옥녀봉을 넘어 언양, 청도 등에 산재한 쇠부리터로 고단한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250여년간 달천철장의 토철을 나르는 동맥역할을 해온 진덕고개도 1900년대 일제의 침략으로 토철 대부분이 열차에 실려 호계역과 장생포를 거쳐 일본으로 수탈되면서 점차 기능을 잃어갔다. [글/ 김기열 기자·사진/ 정동석 기자]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