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의 번영’ 상권 침체로 옛모습 희미해져
‘한 때의 번영’ 상권 침체로 옛모습 희미해져
  • 김영수 기자
  • 승인 2009.11.1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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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중심지 동헌이나 객사·남문 잇는 큰 길
▲ 울산읍성의 객사가 있었던 울산초등학교에서 남문이 있던 시계탑사거리를 잇는 이 길을 울산사람들은 주작대로라고 불렀다.
울산초교~시계탑 사거리 ‘주작대로’라 불려

울산에도 ‘주작대로(朱雀大路)’가 있었다. 한 도시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뻗어나가는 중심도로를 주작대로라고 한다. 큰 도시에는 모두 있다. 울산초등학교에서 시계탑 사거리를 잇는 길이 바로 그곳이다. 울산초등학교 자리는 조선시대 울산읍성의 객사가 있던 곳이다.

이 길에서 울산사람들은 서로 부대끼면서 의견과 정보를 나누고 거래를 텄다. 이곳에서 개인적 경험은 공동의 경험으로 퍼져나갔고 그 속에서 자신이 울산 사람이라는 인식을 키워갔다. 주작대로는 울산사람들에게 ‘울산을 오롯이 담은 원형질’이다.

■ 행정·상업·문화 등 지역사회의 중심지

서양인들은 광장을 중심으로 소통했다. 그리스의 아고라, 로마의 포럼이 그 대표적인 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동양에서는 광장의 역할을 ‘길’이 대신했다. 그러나 모든 길이 이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각 도시의 중심도로인 ‘주작대로’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

흔히 주작대로란 왕성급 도시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읍성이 있는 도시의 중심시설인 동헌이나 객사에서 남문을 잇는 큰 길을 주작대로라고 불렀다는 것이 울산대학교 건축학과 강영환 교수의 설명이다.

강 영환 교수는 “보통 읍성에는 동문과 서문을 잇는 가로망과 중요한 행정시설에서 남문을 잇는 T자형의 가도를 갖고 있다”며 “이 중 동헌 또는 객사에서 남문을 연결하는 큰 길을 보통 주작대로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주작대로의 출발지가 동헌이 아닌 객사란 것에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이는 객사의 성질을 알면 자연히 풀리는 문제다.

강 교수에 따르면 객사는 단순히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가 아니라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가 모셔졌다. 지방의 중심성이 가장 강한 랜드 마크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고을 수령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왕궁을 향해 왕의 공덕을 칭송하는 망궐례(望闕禮) 의식을 거행할 정도로 중앙정부의 위격을 갖춘 시설이었다.

■ 일제시대

주작대로는 구한말 울산읍민들의 주요한 생활 터전이었다. 이곳에서 울산 장이 열렸기 때문이다. 울산읍민들은 1일과 5일 장날이 되면 이곳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팔았다. 동헌과 울산보통공립학교(현 울산초등학교) 앞에서 주작대로를 따라 사람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뤘다.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주작대로를 ‘장터걸’이라고도 불렀다. 경술국치 이후 주작대로 주변의 토지는 일본인 소유로 넘어가고 상설 상점이 들어서게 되지만 5일장을 통한 경제활동은 여전히 한국인 중심이었다.

일제는 1915년 읍성내부 동헌자리에 신축한 울산군청(현 동헌)에서 남문방향(현 새즈믄해거리)으로 새로운 남북도로를 만들었다. 이 주위로 우편국, 경찰서, 일본인 학교인 울산공립 심상고등소학교(현 약사초등학교)가 설치되고 요리점, 시계점, 대서소, 울산 자동차 조합이 들어섰다. 울산의 시장도 이 시기에 상설시장 시대를 맞게 된다. 1933년 상설시장인 울산시장(현 중앙시장)이 들어섰고 이후 1937년 현 성남시장으로 한 번 더 장소를 옮기게 되지만 여전히 주작대로에서는 5일장이 계속됐다.

■ 1960~70년대

이 시기에 주작대로 부근에 자리를 잡은 상인들에 따르면 당시에는 점포와 상점이 결합된 가옥형태인 일본식 건물들이 많았다. 이후 울산읍이 울산시로 승격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건물을 고쳐지었다.

1969년 중구 중앙동에 ‘취미라사’라는 4층 건물의 옷가게가 들어 선 이후부터 이 거리는 남녀 정장을 파는 패션의 거리로 자리 잡았다.

취미라사의 창업주 박병민(72)씨는 “이 거리가 당시에는 가장 번화가였던 만큼 패션과 관련된 점포와 다방이 많았다”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울산의 여론을 형성해 나갔고 심지어 경찰서, 정보기관 사람들이 정보를 수집하려고 많이 들렀다”고 전했다.

■ 현재

이렇게 번성했던 주작대로 부근의 상권도 10년 전부터 남구 삼산 지역의 발전이 시작되면서 사그라졌다. 상권이 신 도심으로 옮겨가면서 현재는 3층 이하의 저층건물들만 퀭하게 남아있는 상태. 울산시 중구 중앙동이라는 행정 구역상의 명칭이 무색할 정도다. 주요 요지에 자리 잡은 건물들도 분양을 마치지 못하고 ‘분양 임대’라는 현수막만 걸려 있다. 주작대로라는 예전의 영광은 사라져버렸다. 울산 사람의 기억 속에서도.

최근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한 주변의 상인들이 상가번영회를 조직했다. 쇠락한 구도심을 살리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그들은 이 거리를 ‘문화의 거리’로 조성하겠다고 나섰다. 주작대로를 포함한 구시가지가 과거의 번성을 재현하기 위한 유일한 대안으로 문화 예술을 든 것이다.

주민들의 바람은 쇠락한 구시가지가 새로 활기를 띄고 과거 주작대로의 번영을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50년간 동아약국 운영해온 김규형 씨

“소 달구지에 야채·땔감 실어 날라

5일장이 설 때면 울산 전체가 장날”

“주작대로에 5일장이 열리면 울산 전체가 장날이었습니다. 시골의 야채, 땔감을 소달구지에 싣고 사람들이 모여들었지요. 주작대로에는 특히 나뭇짐을 싣고와 파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중구 성남동의 같은 자리에서 1960년부터 50년동안 동아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김규형(77)씨는 주작대로를 “한적한 읍길이었지만 5일장이 열리면 울산 지역 사람들이 모두 모여드는 장터길이었다”고 회상했다.

김씨에 따르면 당시 5일장은 현 성남프라자부터 시작해 구 7번 국도를 따라 주작대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서쪽 끝에는 우시장도 있었다. 장날 석양이 지면 모든 거래를 마친 상인들은 현 보훈회관 자리에 있던 주막과 울산양조장(현 푸른약국 자리)을 찾아 탁주 한 사발로 목을 축였다고.

김씨는 일제시대에 있던 건물들의 위치도 추억해 냈다. 현재 스포츠의류 휠라의 점포가 있던 건물 부근에는 마쓰시게(松重)쇼핑이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야마사(山佐)백화점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 마쓰시게 쇼핑은 담배, 화장품, 학용품 등 매우 다양한 품목을 판매했던 상점이다. 또 지금 김 씨가 운영하고 있는 동아약국 자리는 일제시대에 ‘경남여객 자동차 주식회사 울산영업소‘가 있던 곳. 이 곳에 김 씨의 선친이 근무를 하고 있어 어릴 때부터 이 회사의 사택에서 살았다고 김씨는 말했다. 예전 조흥은행 자리에는 단층 건물의 ‘후지여관’이 있었고 이 여관이 불탄 이후 삼일여관이 생겼다고 했다.

김 씨는 주작대로의 의미를 집안의 사당에 빗대 설명했다.

“주작대로는 울산사람에게 연대감과 귀속성을 갖게 만드는 길입니다. 한 집안의 사당은 남이 보기엔 가치가 없는 건물일 지 모르지만 그 집안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장소입니다. 꼭 주작대로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글/ 김영수 기자·사진/ 김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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