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호 둘러 호젓한 길
사연호 둘러 호젓한 길
  • 김규신 기자
  • 승인 2009.10.15 2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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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와 자연사 속삭이고
길은 道다 >1< 사연호 호반길

길은 도(道)이다. 도는 진리다. 따라서 길은 찾는 것은 진리를 찾는 것이다. 우리는 선인들이 걸었던 길을 통해 ‘길들여져’ 왔다. 오늘날 그 길은 변형됐거나 묻혀지고 있다. 따라서 삶도 그 길에서 벗어나고 있다. 본지는 울산의 그 길을 다시 찾아 나선다. 옛 길을 찾아 길이 생겨난 배경, 그 길에 있었던 사연을 정리하고 그 길이 가르치는 삶을 음미해 본다. <편집자 주>

이 길은 푸른 보석을 보러 가는 길이다. 산길을 걷다보면 저 아래 에메랄드빛 호수가 보인다. 사연댐이다. 가는 길 내내 호수를 바라볼수 있는 길은 흔치않다.

울주군 범서읍 곡연리에서 두동면 은편리 까지 4㎞ 남짓. 사연마을이 수몰된 뒤 해발 100m 산 허리에 난 길이다.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 할 만큼 아름다운 참나무숲이 전개돼 있다. 참나무 숲은 수만그루의 수직선이 한결처럼 나란한 모습이다. 이 길을 걷다보면 마음도 가지런할 수 밖에 없다.

이 길은 연화산에 연결된다. 연화산은 ‘여나산’이라고도 발음된다. 그래서 여나산 설화가 있다. 연화산(連花山)을 옛날에는 여나산(餘那山)이라 했다. 고려시대에 어떤 서생(書生)이 여나산에 외롭게 살고 있었다. 그는 학업에 매진하여 마침내 과거에 급제했고, 좋은 집안의 규수를 배필로 맞아 들였다. 혼가에서 기뻐서 노래를 불렀는데 여나산곡이라 했다. 가사와 곡은 전하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얘기다. 고시 지망생이라면 한번쯤 거닐만 하다. 그런 까닭일까? 이 길의 또 다른 진입로인 연화산 은편리 쪽에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고시촌이 있다.

사연댐은 수몰지다. 사라진 마을이 쓸쓸하게 한다. 물 속에는 그곳에서 수백년을 살았던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잠겨있을 것이다.

길은 구비구비 구부러져 있다. 본래 임도로 개설된 곳이다. 황토와 부식토가 부드럽게 밟히는 구간과 쇄석이 깔려 뽀드득 거리는 구간이 이어져 있다.

길에는 혼란스러운 모습이 눈에 걸리지 않는다. 숲과 호수와 하늘 뿐이다. 호젓하다. 이 길 옆에 있는 산림의 일부는 울산자연과학고등학교 학생들이 실습하는 학교림이다.

몇 개의 샛길이 있다. 하나는 욱곡마을, 하나는 한실마을로 가는 산길이다. 이 길도 사람이 다니지 않아 한적하다. 욱곡에 연결된 길은 전국에서도 드문 나선형 길이다. 마치 등대의 탑 내부에 설치된 나선계단처럼 생겼다. 좁고 둥근 분지를 비스듬히 올라가도록 길이 나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을 오르내리는데도 20분 가량 걸린다. 다만 길 입구가 개인 감나무 농장이어서 허락을 받아야 통과할수 있다. 이 길이 제대로 정비된다면 이색적인 산책로가 될 것이다.

이 길에는 봄이면 산딸기가 지천이다. 길가다가 한 웅큼씩 따먹을수 있다.

곡연리로 내려오는 길은 좁고 구불구불하다. 비탈면은 급하다. 그러나 굴러떨어질 염려는 없다. 촘촘히 자란 나무들이 울타리 역할을 한다. 산 허리를 돌아나오는 길 가장자리에는 화석이 눈에 띈다. 물결화석이다. 물결화석이 있다는 것은 그 옛날 이곳이 호숫물이 찰싹이는 가장자리임을 알려준다. 물결화석은 이 밖에 불이 흘렀던 방향과 깊이를 가르쳐 준다. 이 화석 하나만을 곰곰이 분석해 봐도 반나절이 걸릴 것이다.

이 길이 끝나는 지점은 사연댐 방수구 아래다. 이곳에는 공룡발자국 수십개가 나있다. 마치 물 마시러온 공룡처럼 지금까지 옛날 호수 위를 거닐었던 셈이다.

이 길을 답사하려면 두동면 은편리리나 범서읍 곡연리에서 출발할 수 있다.

1950년대 농촌계몽 심취해

야학생들과 넘나들던 그 길

정창화씨

“50년 전 범서읍 진목과 곡연 마을에서 시작된 울산과의 인연은 벌써 50년의 세월이 넘었습니다. 나의 울산생활은 울산의 현대사와 동행한 셈이지요.”

정창화씨(78·문화도시울산포럼 이사장)는 1957년 울산에 첫발을 디뎠다. 농촌 계몽에 포부가 있었던 그는 그로부터 진목·곡연을 비롯 울산의 구석구석까지 발길을 넓혔다.

정 씨가 기억하는 연화산 길은 언양장과 연결된다. 울산장 다음으로 컸던 언양장은 인근 마을 사람들이 다니던 곳이다. 언양장까지 족히 20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다니던 마을사람들은 해가 기울면 모두 함께 돌아왔다. 그때만 해도 간혹 도적들이 출몰하기도 해 무리지어 다녀야 안전했다. 특히 욱곡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산을 넘어야 했고 그들이 넘던 연화산길을 동행했던 기억이 새롭다고 한다. 지금은 곡연댐이 건설되고 그림같이 깊고 멀었던 산길 중 일부는 지워졌지만, 댐에 고인 수정같은 물과 자신이 일궜던 농토를 바라보며 걷는 연화산길은 누구보다 정겨울 수 밖에 없다.

그가 곡연에서 흘러나오는 거랑 옆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피마자 재배 때문이었다. 친구와 함께 설립한 ‘사단법인 국토개발공사’가 전국의 버려진 땅을 일구고 피마자를 심는 사업을 시작했고 그는 울산 지역을 맡았다. 당시 피마자 기름은 화장품과 비누의 원료가 되는 수입원이었다.

“초지로 버려진 땅을 개간해 심은 피마자의 초록 잎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고 술회한 그는 “그 땅은 작고한 울산의 부호 이종하씨 소유였는데, 몇 차례 간곡히 부탁해 빌려쓸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 야학을 열고 갓 결혼한 아내와 마을 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이따금 인근 숲을 산책하는 생활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밤이 되면 각 마을의 부녀자들이 배움터를 찾아 한글도 배우고 세상 살아가는 얘기를 나눴다. 이 야학은 훗날 북정동 3·1회관 옆에 세워진 야학당으로 전통이 이어졌다.

그가 피마자밭을 일굴 때 교우했던 사람은 고인이 된 서상연 시인과 정치인 이규정씨다. 사일 사람이었던 서 시인은 당시 어느 신문사의 기자 일을 하고 있었던 문학청년이었다. 주말마다 사일의 본가를 찾아 오던 서 시인과 당시의 농촌 계몽운동에 대해 깊은 얘기를 나눴다. 진목 사람이었던 이규정씨는 고려대학교 학생회장이었다. 그와 나눈 정담은 주로 시국담이었다. “참 곧은 분이었고, 얼마전 그 분이 작고한 부친의 장례를 고향 인근에서 수목장을 치렀는데 여전히 생각이 신선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세 사람이 함께 어울릴 때도 있었다. 피마자 밭의 원두막이었다. 그는 지금도 서상연 시인이 울산 읍내에서 사온 수박을 나눠 먹으며 울산의 미래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던 때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정창화 이사장은 전후 울산 발전을 위해 청춘을 바쳤고 한 때 공직에 몸을 담기도 했다. 1993년 울산투자금융(주) 대표이사를 마지막으로 현직에서 물러났으나 로타리클럽에서의 봉사활동은 물론 최근에는 문화도시 울산포럼의 이사장직을 맡아 울산의 문화발전에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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