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 큰사전
조선말 큰사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9.10.05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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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지구상에는 200개가 넘는 많은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 이 가운데,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함께 가진 나라는 얼마나 될까? 언어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고 해도 민족 고유의 문자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제 한글은 한국의 대표적 문화상품이 되었다. 1997년 세계기록유산에 올랐고 세계 64개국 742개 대학이 한글을 가르친다. 국제특허협력조약에선 10대 국제 공용어로 채택됐다.

지난 8월 31일은 ‘한글학회’가 창립된지 101돌 되는 날이었다.

1921년 12월 3일 국어운동의 선구자 주시경 선생의 문하생인 임경재·최두선·이규방·권덕규·장지영·신명균 등 10여 명이 ‘휘문의숙(徽文義塾)’에서 한국 최초의 민간 학술단체인 ‘조선어연구회’로 창립한 이래 1931년 1월 학회의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1949년 9월에는 현재의 ‘한글학회’로 부르게 되었다.

1942년 10월부터 8·15광복까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학회 관계자 33인이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는 수난을 겪었으며, 이윤재·한징, 두 사람은 옥사하였다.

필자는,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도 꿋꿋한 명맥을 이어, 1947년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우여곡절 끝에 빛을 본 <조선말 큰사전>의 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조국이 광복의 희열에 들떠 있던 1945년 9월 어느날, 경성역(현 서울역) 조선통운 운송부 창고를 뒤지던 경성제국대학 학생들이 방대한 분량의 원고뭉치를 발견하는 순간 환호성을 지른다. 그간 행방이 묘연한 원고를 찾기 위해 함흥 검찰청에 문의도 하고, 서울 검찰청을 뒤지기도 하였으나 허사였다. 그런데 그토록 애타게 찾던 원고를 경성역 어두침침한 창고 한 구석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2만 6천 5백 여장에 달하는 이 원고뭉치는 ‘조선어학회사건’ 당시 일제에 사건 증거물로 압수당한 <조선어사전>의 핵심원고였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 12월 서울의 ‘휘문의숙’에 모인 최두선, 임경재, 권덕규, 장지영 등은 ‘민족의 혼’을 지켜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아 학술단체인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였고 그 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

한편 일제는 민족정신이 투철한 한국인을 사상범으로 분류, ‘조선사상범 예방 구금령’을 공표하는 등 민족운동이나 민족계몽운동을 하는 한국인을 마음대로 구속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1942년 어느날, 함흥영생고등여학교에 다니던 박영옥은 기차 안에서 한국말을 쓰다가 조선인 경찰관 야스다(조선이름 안정묵)에게 검거된다. 연행돼 조사를 받던 중, 서울의 정태진으로부터 민족정신을 잃지 않도록 교육받은 사실이 밝혀지자, 경찰은 정태진을 추적하고 그 결과 서울에서 <조선어사전>이 편찬되고 있음을 알아냈다. 또한 혹독한 고문으로 ‘조선어학회’가 민족운동을 하는 단체라는 억지 자백까지 받아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9회에 걸쳐 진행, 1945년 1월에 최종 선고가 내려졌다. 유죄가 선고된 자에게는 “고유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이다.”라는 결정문이 내려졌다. 이극로·최현배·이희승·정인승은 판결에 불복, 상고하였으나, 8월 13일자로 기각되었다.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이었다.

일제의 온갖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말 사전 편찬의 뜻을 펼쳐 온 여러 학자들의 고초를 담고 1947년 10월 9일, 드디어 <조선말 큰사전> 제1권(을유문화사刊)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이는 국가의 성립에 앞서 표준언어작업이 먼저 길을 열었다는 깊은 뜻도 담고 있었다.

이후 6·25 전쟁을 겪는 등, 혹독한 시련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 꾸준한 편찬작업을 진행한 끝에 <조선말 큰사전>은 1957년에야 6권 전질이 완성되었다. 하마터면 허공으로 사라져 오랜 세월이 지체될 뻔 했던 <조선말 큰사전>은 우여곡절 끝에 완간됨으로써 민족의 혼을 담은 빛나는 결정체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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