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혼(魂)
민족의 혼(魂)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9.09.1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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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청계천의 상류 쪽을 걷다 보면 을지로 2가 삼각동 한화빌딩 근처에서 아담한 표석 하나를 만나게 된다. 가로·세로 60~70센티 크기의 이 표석엔 ‘조선광문회는...신문화의 요람이자 나라를 잃은 지식인의 사랑방 구실을 하던...’이라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매일 수 많은 시민이 오고 가지만 이 보잘것없는 표석을 눈여겨 보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이곳이 ‘조선광문회’ 건물이 있던 자리라는 사실도 알 리가 없다.

그러나, 바로 이곳에서 100미터도 채 안 되는 곳에는 어엿한 ‘베를린 광장’이 있다. 2005년 9월 서울시가 독일 베를린시와의 우의를 기념하는 뜻에서 조성한 30여평의 광장인데, 이곳엔 높이 3.5미터, 폭 1.2미터의 육중한 베를린 장벽 일부를 옮겨 온 ‘덩어리’ 세 개가 떡 버티고 있다. 또한 베를린시의 상징인 곰상과 독일 전통의 보도포장, 의자 따위가 배치되어 있다.

1907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고등사범부 지리역사학과에 다니던 만 17세의 소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학교를 중퇴하고 도쿄의 슈에이샤(秀英社)에서 인쇄시설과 기술자 5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관상감(觀象監)에 근무했던 부친 최헌규(崔獻圭)는 농력(農曆)과 한약재 판매로 축적한 거금을 약관의 아들에게 선뜻 대 주었고 최남선은 신문관(新文館)이란 출판사를 차렸다. 신문관은 ‘소년’ 같은 잡지 외에 한국 문고본의 효시인 6전(錢)소설을 기획해 ‘홍길동전’ ‘심청전’ ‘사씨남정기’ ‘전우치전’ 등을 펴냈다. 일제가 조선의 진귀한 서적들을 일본으로 빼내 가자 최남선은 현채(玄采)·박은식(朴殷植) 등과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조직해 고전 간행 및 보급 운동에 나섰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발해고’ 등 300여 종의 고전이 조선광문회에서 복간되었고 ‘이 충무공 전서’ 같은 전집류도 간행되었다. 조선광문회가 없었다면 아마 많은 고전들은 자취를 감추었을 것이다.

또한 최초의 우리말 ‘말모이(큰사전)’를 편찬한 신문화의 요람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백성이 민족혼을 잃지 않는 방법 가운데 선조들의 정신이 담긴 책의 간행, 보급은 으뜸 가는 일이었다. 조선광문회는 젊고 혈기왕성한 지식인들에게 고전간행을 핑계로 자연스럽게 모여 그 당시 시국에 관한 생각들을 나눌 수 있는 고급 살롱 역할도 하였다. 이곳에 있는 외국 신문 잡지들을 통해 파리강화회의,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론, 이승만·안창호 등의 구미(歐美) 독립운동활동, 도쿄유학생 2·8독립선언 등을 알게 된 지식인들은 자연히 항일운동을 꿈꾸게 됐다. 1919년 2월 마침내 천도교·기독교·불교가 참여, 거족적 도모를 하게 된다. 최남선이 3·1 독립선언서를 구상한 곳도 바로 조선광문회였다.

마침내 기미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 조선광문회에서 태동한 대한독립의 꿈이 우렁찬 함성으로 만방에 울려 퍼졌다.

나라 잃은 상황에서 지식인들이 모여 그 설움을 서로 달래며 조국의 독립된 미래를 꿈꾸던 조선광문회가 갈수록 국민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근대정신의 발원지이며 기미독립운동의 태동지였던 조선광문회. 3·1운동 직후 일제에 의해 압수된 조선광문회 ‘파랑 2층집’은 1969년 4월 도시계획에 따라 철거돼 흔적조차 없다. 소설가 월탄(月灘) 박종화는 그해 1월 한 신문 기고에서 “반찬가게로 전락한 조선광문회 건물의 처지를 딱하게 생각하며 보존해야 한다” 고 주장했으나 끝내 철거되고 말았다.

이제 그 근처엔 베를린장벽에서 뜯어다 놓은 장벽 몇 덩어리와 미국의 팝아트 작가 클래스 올덴버그의 작품인 ‘스프링’이 상징조형물인 양 세워져 있다.

서울시에서 추진중인 도시환경정비 기본법에 따라 삼각동과 인접한 수하동 일대에는 소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다. 조선광문회 터는 이 공원 부지에 포함되어 있다. 최근들어 조선광문회 건물이 복원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 가고 있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느 민족에게나 그들의 정신이 하나로 모이는 도시가 있다. 대한민국 서울도 그런 도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김부조 시인·동서문화사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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