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생활 35년… 지금은 행복해요
한국생활 35년… 지금은 행복해요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9.09.0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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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월계 (베트남 출신·울산시 남구 삼산동)
처음 1975년도 한국에 왔을 때는 사는 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힘들었다. 한국말도 할 수 없고 도와주는 사람도 전혀 없어서 너무 막막했다. 남편도 병중이고 시댁에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답답한 것도 많았지만 참고 살았다.

막내는 6개월, 큰아이가 8살, 둘째가 6살, 이렇게 3명의 아이와 살면서 겪은 마음고생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 한국말을 하지 못했던 큰아이가 아이들에게 놀림과 따돌림을 당해서 엄마에게 울고 떼쓰며 하소연할 때는 아이랑 같이 울었다. 아이 아버지도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서 가슴앓이만 하여야 했다. 남편과는 한국말이 아닌 영어로 대화를 하였기 때문에 한국말을 배울 수 있는 여건이 전혀 되지 않았다.

원래 중국, 홍콩에서 가족 전체가 살았던 나는 베트남에서 태어나 중국학교에 다니게 된 것을 계기로 베트남학교는 전혀 다니지 않았는데, 큰아이가 베트남에서 3학년 중급학교에 다녀서 중국어를 할 수 있었다. 그때 우리 집안은 베트남에서 중국음식점을 운영하였다. 그 때문에 베트남어를 배울 수 있어 사용할 수 있었다.

남편과는 1966년도에 베트남에 중장비기사로 일할 때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5년도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기 1시간 전에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내가 무거동 삼호에 살고 있었을 때는 직장을 다니면서 돈을 벌고 싶었다. 남편이 처음에 다리를 다쳐서 쉬다가 병이 깊어지면서 간경화로 드러누웠고, 그런 후 7년 동안이나 병간호를 하다 보니 병원비가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도너츠를 넘겨받아 ‘다라이’에 담아서 팔러 다녔다. 어떤 날은 다 팔기도 하였지만 팔리지 않을 때는 밥 대신에 도너츠로 허기진 배를 채우기도 하였다.

시장에서 알게 된 방앗간 하시는 아저씨가 1802년 현대자동차에 소개해 주셔서 그렇게 다니고 싶었던 직장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현대자동차 소형 포니 부서에 근무하였다. 한국말을 전혀 사용할 수 없었지만, 영어로 대화할 수 있었던 당시 상사이신 부장님과는 유일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자동차 부품에 대한 부분을 일일이 설명해 주셨기에 나에겐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직장생활을 4년 동안 하다가 그만두게 되었다. 이유는 남편이 병이 악화되어 돈도 중요하지만 나의 따뜻한 사랑이 더 중요할 것 같아서였다.

집에서 동네 아는 분에게 머리 파마(미용기술)를 배우려 하는데 한국말을 전혀 할 수 없어서 시험에 몇 번 도전했지만 실기는 가능한데 이론이 전혀 되지 않아 번번이 떨어졌다. 언제나 한국어가 문제였다. 미용실 원장님이 많이 안타까워했다.

그냥 집에서 조금씩 아는 분들만 상대하면서 푼돈 정도만 벌어 가족들의 생계를 이어가야만 하였다. 토, 일요일 남는 시간에는 부산에 있는 베트남수용소에 가서 도와주기도 하였다. 수용소에 나눠주는 우유를 가져와 막내에게 줄 때의 그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후에 친구에게서 서울에 잠바 공장이 있는데 공장에서 잠바를 가져와 팔러 다니라고 해서 그걸 울산에 가져와 이곳저곳에 팔러 다녔다. 또 미포조선 하청 다니는 곳에 일하러 가자고 해서 그곳에 따라가서 배에 올라가 그 안에 있는 모래를 청소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동갑내기 아줌마(그 당시 42세)가 현대중공업에서 인원을 모집한다며 소개해 줬지만 연령 제한에 걸렸다. 하지만 다행하게도 부사장님이 이력서를 보시고는 아픈 남편과 식구를 부양해야 하니까 근무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그때부터 월급을 제대로 받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영국 배 선주님을 만나서 영어로 이야기할 수 있어서 “영국에 우리 딸이 있으니 배 선주님이 우리 아이를 외할머니와 만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였고 배 선주님께 안부도 묻게 되었다.

또 배 선주님은 윗분들에게 잘 말해서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고, 그 일을 계기로 금강개발산업(주)에 근무하게 되었다. 6년 동안 그곳에 근무했다. 그 당시에 남편이 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음은 너무 힘들었지만 부사장님 도움으로 남은 가족들을 돌볼 수가 있었다. 또한 현대중공업에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이 많이 도와주었다.

그때부터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해서 장학금도 받고 학교생활을 착실히 해서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딸은 한양대학원에서 석사과정도 마쳤다. 지금은 모두 좋은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지금 한국에 시집오는 베트남, 중국 여성분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이분들은 한국 풍습을 제대로 익히지 않아서 어려운 점이 대단한 많다. 한국여성들은 가정에서 남편에게 음식도 만들어 주지만 베트남에서는 가정에서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생활에 적응하기도 힘들고 가장 힘든 게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는 일인 것 같다.

또한 시댁 어른이 남편하고 같이 생활하면 며느리로 인정해야 하는데 “내가 돈을 주고 너를 사왔다”는 식으로 말씀하실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가장 고통스럽게 느껴진다고 한다. 부부싸움을 할 때 “너의 나라로 돌아가라”고 할 때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살아온 지 어느덧 35년이 되어 가지만 한글을 제대로 읽고 쓰는 일에 부족함이 너무 많아 2005년부터 ‘울산여성의 전화’를 통해 한글을 꾸준히 배우고 있다. 이제는 갓 시집오는 딸 같은 베트남 이주여성을 보면서 한국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게 되었다. 울산여성의 전화와 같은 곳에서 상담통역 활동을 하면서 내 나이에 맞지 않는 큰 보람을 나누기도 한다.

지금은 너무 행복하다. 그 동안의 내 삶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밑거름이 된 것 같아 감사하고, 지금 만나고 있는 다문화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것이 진정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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