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과 소복(素服)
부활절과 소복(素服)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3.28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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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부활절은 오는 31일이다.

부활절은 춘분(지난 20일)이 지나고 첫 보름달(지난 24일)이 뜬 다음 일요일로 정한다. 양력과 음력으로 모두 적용해 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부활절이 되면 개신교의 여성 신자들은 소복(素服) 차림으로 예배를 드렸다. 기자의 어머니도 그렇게 하셨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언제부턴가 이런 모습은 보기가 힘들어졌다.

‘부활절에 왜 어머니들은 소복을 입으셨을까? 그리고 그런 풍습은 왜 사라졌을까?’

이런 의문이 생겼다. 부활절은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가 다시 살아난 날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명절이다. 소복은 상복(喪服)으로 입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예수가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날 소복을 입었으니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나 아직 이렇다 할 만한 답은 찾지 못했다.

한국 개신교는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는 전통이 있다. 교파를 초월해 지역의 교인들이 한 곳에 모여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부활절 연합예배는 광복 직후인 1947년부터 시작됐다. 그해 부활절이었던 4월 6일 새벽 장안의 개신교인들이 서울 남산에 올라 예배를 드린 것이다. 연합예배는 그 전에 조직된 한국기독교연합회와 미8군이 주관했다. 당시는 한국 개신교가 분열되기 전이었다. 연합회라는 것도 장로교와 감리교만 함께 하면 되는 것이었다.

당시 신문기사를 찾아보니 예배는 오전 6시 15분에 시작됐다. 이 예배를 위해 미군정청은 오전 5시까지였던 통행금지 시간을 30분 단축해 4시 30분부터 통행할 수 있도록 특별조치를 했다. 예배는 일제강점기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있던 곳에서 열렸다. 신궁은 신사(神社)보다 격이 높은 왜신전(倭神殿)이다. 조선신궁은 일제가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 일본 신도(神道)의 총본산이었다. 수많은 조선인 개신교인들도 이곳에서 왜신(倭神)에게 굴욕적인 참배를 해야 했다. 개신교인들은 해방을 맞아 이곳에서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렸다.

비록 일제의 강요에 못 이겨 한 행위였지만 그들은 그런 방법으로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悔改)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니 너나없이 소복 차림으로 예배에 참례했고 그것이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이어졌던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교인들은 그렇게 예수의 부활을 찬양하며 광복된 조국의 영광을 간구(懇求)했을 것이다.

부활절 연합예배의 전통은 지금도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사분오열된 지금의 한국 개신교의 상황에서는 그 구심체가 모호해져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됐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했다. 그러나 모두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절개를 목숨보다 중하게 여겼던 조선 선비의 후예들 가운데는 신앙의 절개를 지켜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5~6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해방직후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들을 출옥성도(出獄聖徒)라고 부른다. 해방을 맞지 못하고 옥사한 인물도 있다.

출옥성도 가운데 이기선과 손양원은 울산과도 인연이 있다. 이기선은 1917년부터 1920년까지 울산병영교회에서 시무했다. 이 교회는 병영 삼일만세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그때의 지도자가 이기선이었다. 손양원은 해방전 방어진제일교회와 남창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올해도 울산에서 부활절 연합예배가 열린다. 교회가 굳이 연합예배를 여는 의미가 분명해야 할 것이고 지역사회에 선포하는 메세지는 선명해야 할 것이다.

강귀일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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