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원 작가와 함께하는 ‘책 한 권 울새가 노래하는 문학의 숲길을 따라’] 울새가 노래하는 곳-16
[최정원 작가와 함께하는 ‘책 한 권 울새가 노래하는 문학의 숲길을 따라’] 울새가 노래하는 곳-16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3.28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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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il49@naver.com

◇해질녘의 고사리밭

우리 가족은 누구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갑작스럽게 바뀐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약 보름 정도 지나고 나니 각자 조금씩 적응이 되어 가는 듯 보였다. 나는 며칠 동안 주변을 둘러보며 나름대로 길도 익히게 되었고 이러저러한 비밀스러운 장소도 보게 되었다. 언덕 아래 고향슈퍼 앞 공터에는 마을버스 정류장이라고 쓴 팻말이 전봇대에 붙어 있었다.

아침 일찍 도착한 마을버스는 주로 읍내 학교로 가는 학생들을 태운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지만 학교가 읍내 어디쯤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아침이 되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루에 나와 앉아서 밖을 내다보며 토굴집 풍경에 대해 각자의 느낌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약수터에 가서 떠온 약수를 마시기도 했다.

작은오빠는 일찍부터 마당으로 나가 잡초도 뽑고 제멋대로 자라 있는 나뭇가지들을 잘라냈다. 언니와 나는 주방에서 아침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우리 삼 남매는 마당에 놓인 평상에 앉아서 잠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때 점식이 삼촌이 씨감자라며 불룩해 보이는 자루를 어깨에 메고는 불쑥 찾아왔다. 아버지는 곧장 점식이 삼촌과 함께 삽과 곡괭이를 들고 텃밭으로 걸어갔다. 우리 삼 남매도 뒤를 따랐다.

먼저 점식이 삼촌과 아버지가 곡괭이를 쳐들었다 아래로 내리찍었고 깨진 흙을 작은오빠가 삽으로 잘게 부쉈다. 단단한 흙을 찍었던 곡괭이가 다시 허공으로 치켜든 순간 튕겨 나간 흙덩이가 햇빛을 받아 반들거렸다. 반들거리는 시커먼 흙덩이 사

이에 자주색이 도는 지렁이 한 마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흙덩이와 같이 땅에 떨어진 순간 지렁이가 놀랐던지 힘을 주어 몸의 앞부분을 늘리는 동시에 뒷부분을 끌어당겨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나무 꼬챙이로 살짝 건드려 보았더니 녀석은 온몸으로 자신의 몸길이를 바짝 줄어들게 만들어버렸다. 그 모습이 신기한 나머지 또 한 차례 건드려 보았다. 그랬더니 녀석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곧 흙에 구멍을 뚫고는 서서히 모습을 감추어버리는 것이었다.

“너무 징그럽다.”

언니가 지렁이처럼 몸을 움츠리는 시늉을 해 보이며 말했을 때 작은오빠가 이상한 말을 했다.

“어허. 위대하신 견훤 님을 보고 징그럽다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내가 말했다.

“작은오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작은오빠가 들고 있던 삽을 밭에다 내리꽂고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또 잠깐 역사 강의를 해야겠군. 옛날에 한 소년이 있었는데 그는 물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힘이 장사가 되는거야. 그래서 사람들이 그 소년을 가리켜 지렁이가 화한 사람이라고 말하게 되었지. 이후 소년이 자라 고구려 왕건, 신라의 궁예와 함께 후 삼국시대를 이끌었던 바로 그 영웅인 견훤이 된 거야. 당시 사람들이 견훤을 가리켜 지렁이 왕이라고 부르기도 했었지.”

역사 전공자답게 역사 쪽으로는 작은오빠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우리 삼 남매가 잠깐 웃고 수다를 떨었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텃밭에는 기다란 이랑이 여러 개가 만들어졌다.

점심으로 감자수제비를 만들어 먹고 나서 아버지와 점식이 삼촌은 감자를 심었고, 나와 언니는 옥수수 알갱이를 땅에 묻었다. 작은오빠는 양동이 가득 펌프 물을 길어와서는 밭이랑에다 부었다. 텃밭 한 모퉁이에는 배추와 상추 그리고 고추와 파도 조금씩 심었다.

점식이 삼촌을 쳐다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감자 심는 시기가 좀 늦지 않을까?”

“지금이 오월 초니까 다른 지방에 비해 강원도는 기온이 좀 낮은 편이어서 괜찮을 겁니다.”저녁 식탁은 풍성했다. 점식이 삼촌이 가져다준 각종 산나물과 버섯. 거기에 작은오빠가 낮에 냇가에 가서 건져 온 가재와 다슬기 등이 식탁 위에 가득 올랐다.

아버지가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여보! 찬찬히 많이 들어요. 이건 음식이 아니고 보약이요. 보약.”

모처럼 어머니는 죽 대신에 밥 한 공기를 다 비웠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다음 날 아버지와 작은오빠 그리고 언니까지 점식이 삼촌을 따라 약초를 캐러 산으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나도 같이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막내는 어머니 곁을 지키는 게 좋겠다고 작은오빠가 말했다. 그때 곁에 있던 어머니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난 괜찮으니 가고 싶으면 막내도 같이 다녀오도록 해.”

집을 나선 지 한 시간 남짓, 산과 산이 연이어 겹쳐 있어서 어디를 봐도 시야를 가리고 있는 것은 푸른 숲뿐이었다.

울창한 숲과 숲 사이로 조각이 나 있는 듯 보이는 파란 하늘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산길은 말이 길이지 그냥 사람들이 자주 오르내리다 보니 저절로 길이 만들어진 듯 보였다.

점식이 삼촌과 아버지가 맨 앞에서 올라갔고, 그 뒤를 작은오빠가 따라갔다. 언니와 나는 작은오빠의 뒤를 바짝 쫓았다. 산길에는 바람에 휩쓸리면서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고 더러는 발길에 걸리는 것도 있었다.

나는 벌써 다리도 아프고 숨까지 차올라서 더는 못 올라갈 것 같았다. ▶17화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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