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원 작가와 함께하는 ‘책 한 권 울새가 노래하는 문학의 숲길을 따라’] 울새가 노래하는 곳-15
[최정원 작가와 함께하는 ‘책 한 권 울새가 노래하는 문학의 숲길을 따라’] 울새가 노래하는 곳-15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3.26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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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il49@naver.com

밝은 날 다시 보니 집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넓은 거실과 크고 작은 두 개의 방과 주방 그리고 주방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아담한 황토방까지. 안방은 당연히 아버지와 어머니가 쓸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황토방을 쓰겠다고 했다. 결국 아버지는 안방과 황토방을 왔다 갔다 하게 되었다. 언니와 나는 같은 방을 써야 했고 선택의 여지가 없던 작은오빠는 다락방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작은오빠는 세간살이를 여기에 놓았다 저기에 놓았다 했다. 안방에 놓아두었던 텔레비전이 다시 마루에 놓이게 되었고 책장 역시 제자리에 놓였다고 생각했는데 안마의자와 자리가 바뀌게 되었다. 냉장고와 세탁기 역시 어제 놓였던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옮겨졌다. 황토방에는 벽에 선반을 달아 이것저것 자주 사용하지 않는 주방 집기들을 올려놓았다. 나는 빈 박스와 선반을 만들고 남은 판자 조각과 망치, 톱 등을 치우는 일을 도왔다.

큰 짐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때 우리 가족은 통나무 식탁 앞에 둘러앉아서 미리 준비해 온 빵을 먹었다. 소파가 없어서 빵을 먹고 나서도 우리 가족은 통나무 식탁 앞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통나무 식탁에는 한동안 침묵이 쌓여가고 있었지만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우리 모두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이 낯선 산속에서 어떻게 어머니의 암을 낫게 할 수 있으며, 우리 가족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에 대한 생각 말이다.

게다가 익숙해져 있던 일상의 안전망을 벗어나 낯선 산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참담한 심정이야 누구도 다를 리 없었을 것이었다.

작은오빠와 언니가 커피를 마시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구기자차를 달라고 했다. 아버지가 구기차를 고집하는 이유는 구기자가 구겨진 사람의 몸과 마음을 펴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커피도 구기자차도 좋아하지 않은 나는 대문 밖으로 나가보았다.

밖에서 바라본 갈색 지붕은 어찌나 얕은지 집은 마치 거대한 거북이 한 마리가 납작 엎드려 있는 듯 보였다.

처마에서 길게 내리뻗은 동으로 된 물받이는 색이 바래 청색을 띠고 있었고 돌담 밑에는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돌담 위에는 구불구불한 포도나무 줄기가 뻗어 더러는 푸른 혈관 같은 담쟁이 줄기와 얽히고설켜 있었다.

우리 삼 남매는 나란히 집 뒤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주변의 산과 경계가 분명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꽤 넓어 보이는 텃밭이 자리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무슨 씨앗을 뿌려놓은 듯 보였으나 김을 매지 않아 밭은 쑥과 엉겅퀴 그리고 도깨비 풀들로 뒤덮여 있었다.

잠깐 스치기만 했는데 언제 그랬는지 청바지에는 도깨비 풀이 여기저기에 달라붙어 있었다. 닭장으로 쓰였던 곳으로 보이는 공간에는 부서진 닭똥만 수북이 쌓여 있어서 그곳이 닭을 기르던 공간이라는 걸 짐작하게 했다. 마당 한쪽에는 물 펌프가 놓여 있었고 뒤쪽에는 대나무로 엮은 가림막이 세워져 있었다. 잠깐 그 가림막에 눈길이 가 있던 작은오빠가 말했다.

“와! 여름에는 여기서 등물을 해도 좋겠는데.”

작은오빠를 쳐다보며 내가 물었다.

“작은오빠, 등물이 뭐야?”

“응. 등물은 말이야. 샤워 시설이 없을 때 팔다리를 뻗고 엎드린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람의 허리 위에서 목까지 씻어주는 것을 그렇게 말해. 주로 아버지 세대에서 많이 이용했을 것이야.”

언니가 입을 삐죽이 내밀며 말했다.

“완전 원시적이군.”

언니는 토굴집이 산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과연 텔레비전이나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지붕 위에는 코끼리만 한 안테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언제부턴가 어머니는 화장실에 들어가기만 하면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 땐 두세 시간을 앉아 있을 때도 있었다. 다급해진 나는 방방 뛰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아버지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급하면 마당의 화장실을 이용하라고.”

놀라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가 말했다.

“마당에도 화장실이 있다고요?”

아버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굴뚝 옆의 작은 창고 같은 곳이었다. 나는 급히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화장실은 어둡고 퀴퀴한 냄새까지 났지만 나는 엉덩이를 치켜든 채 엉거주춤 앉았다.

내가 다시 마당으로 나왔을 때 언니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야. 최진실! 넌 참 대단한 아이로구나. 저런 곳에서 볼일을 다 보다니. 암튼 별종이야.”

그때 아버지가 목청을 높여 말했다.

“뭐가 대단해.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지.” ▶16화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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