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면의 정사' – 최고의 반전
영화 '가면의 정사' – 최고의 반전
  • 이상길 기자
  • 승인 2024.03.21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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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면의 정사' 한 장면.

1993년 1월이었다. 응시한 대학으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은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재수까지 해서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붙었으니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바야흐로 터프가이 민수형(최민수)의 카리스마가 빛나는 <걸어서 하늘까지>라는 드라마가 멋진 주제곡과 함께 공전의 히트를 치던 때였다.

또 캠퍼스드라마들로 <우리들의 천국> 시즌2에 새롭게 합류한 장동건의 저세상 잘생김이 막 신드롬을 일으키고, <내일은 사랑>에서 주인공 이병헌의 매력이 뿜뿜하던 시절이었다. 가요계에선 원조 꽃미남 가수 김원준의 '모두 잠든 후에'와 손지창과 김민종이 결성한 더 블루의 '너만을 느끼며'가 여전히 길보드차트(리어카에서 팔았던 불법복제 카세트테이프 판매순위)를 씹어먹고 있었다. 

그렇게 우주 만물이 아름답게 빛나던 그 시절, TV에서 영화 광고를 하나 했었는데 그게 바로 볼프강 페터젠 감독의 <가면의 정사>였다. 개봉 영화를 TV에서 광고하는 건 지금도 이례적인 일인 만큼 그때는 더욱 생경하게 다가왔는데 제목은 또 '가면의 정사'라니. 당시 TV광고를 처음 보면서 '에로영화를 왜 TV에서 광고하지'라는 생각이었다. 

허나 이젠 어엿한 대학생. 천도극장인지 태화극장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친한 친구와 TV에서 광고하는 에로 영화를 보러 간다는 심산으로 극장을 찾았었다. 짜더러 할 일도 없고 해서. 헌데 그날 난 영화 인생 통틀어 최고의 반전 영화를 영접하게 됐다. 

반전 영화라면 보통 <식스 센스>나 <유주얼 서스펙트>를 많이 떠올리는데 그들 영화의 반전도 사실상 <가면의 정사>를 모방한 거라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시쳇말로 '식스 센스급 반전'의 원조가 <가면의 정사>인 셈. 거기다 샤론 스톤을 닮은 여주인공 그레타 스카치의 농익은 섹시함이란. 실제로 1992년 <원초적 본능>의 캐서린(샤론 스톤) 역은 그레타 스카치에게 먼저 제안이 갔었다고 한다. 

참, <가면의 정사>는 부부인 댄(톰 베린저)과 쥬디스(그레타 스카치)가 늦은 밤 함께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사고 후유증으로 남편 댄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의식이 회복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기억이 아예 없는 상황에서 어느 날 아내 쥬디스의 외도 증거를 발견하는 댄. 그때부터 영화는 스릴러로 장르가 바뀌고, 마지막 반전까지 알게 되면 왜 제목이 '가면의 정사'인지 용서가 된다. 아니, 그 시절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덫에 걸린 정사의 광란적 음모'나 '남자의 두뇌를 앞서가는 한 여자의 환상적 더블플레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는데 반전을 알고 나면 촌스럽고 투박한 그들 문구가 이 영화의 반전을 얼마나 정성껏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나름 순수했던 시절이었지. 우리도 그렇게 순수했던 그 시절, 친구와 나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반전의 충격에 극장을 빠져나와서도 한참 동안 영화 이야기를 했었다. 우리 인생에 다시는 없을 '최고의 반전'이었다며. 개인적으로는 구름 위를 걷던 시절에 봤던 만큼 최고의 반전 뒤로 어둡고 우울한 영화였는데도 <가면의 정사>는 그 어떤 영화보다 밝고 희망찬 기억으로 남게 됐다. 하긴, 그땐 공포영화의 정점에 선 일본 영화 <링>을 봤어도 아름답게 각인되지 않았을까. 

아무튼 그때 같이 영화를 본 친구가 얼마 전 울산에 왔었다. 지금은 인천에 살면서 사업을 하고 있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 되어 알게 됐으니 아직도 나름 자주 연락하는 친구 중에는 가장 오래된 친구다. 이런저런 이유로 얼굴을 보게 된 게 거의 5년 만인데 친구가 온다는 소식에 문득 그 시절 같이 봤던 이 영화가 생각이 나 다시 찾아보게 됐던 거였다. 30여년 만에 다시 본 <가면의 정사>는 여전히 잘 만들어진 반전스릴러 영화였고, 다만 오랜만에 다시 보니 '최고의 반전'은 이 영화가 아니라는 걸 문득 깨닫게 됐다. 

울산시에 볼일이 있어 울산을 찾은 그 친구와 나는 시청 근처 커피숍에서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봤지만 코로나19 등을 겪으며 사업이 녹록지 않아 힘들어 보였고, 그런 친구를 보며 요 모양 요 꼴로 사는 내 모습을 반추하니 역시나 반전이었다. 그 시절에 우린 둘 다 자기 미래가 반짝반짝 빛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거든. 그렇다. 최고의 반전은 바로 우리 인생이었던 것.  

나만 해도 그렇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가득 찼던 그 시절엔 누군가 말했듯 열 개 중에 한 개만 좋아도 앞뒤 안 따지고 기술을 걸었는데 지금은 열 개 중에 한 개만 아니라도 움츠려든다. 진심을 다해 몇 번 해봤더니 결과란 게 뻔하고, 혼자 외로운 게 같이 있을 때의 괴로움보다 낫더라는 것. 이거 반전 맞죠? 꿈만 해도 그렇다. 그 시절엔 꿈(성공)을 이루지 못하면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개뿔 내려놓고 나니까 크지는 않아도 자잘한 행복을 자주 느끼게 되더라. 그렇다고 지금 꿈이 없는 것도 아니다. 바로 즐겁게 하루라도 더 사는 것. 해서 그 시절엔 파란불만 들어오면 무작정 건넜던 횡단보도도 요즘은 파란불이 들어와도 차가 다 멈춰 섰는지 확인하고 건넌다. 그 시절 당당했던 X세대 청년은 그렇게 꼰대가 되어가는 반전도 겪고 있다. 하지만 현시점에 최고의 반전은 뭔지 아세요? 반전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것. To Be Continued.. 1993년 1월 22일 개봉. 러닝타임 88분. 

이상길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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