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준의 인생한담] 값비싼 교훈
[박재준의 인생한담] 값비싼 교훈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3.18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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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이 대접을 나이가 한 살 위인 딸이 받아야겠지만 우리 집은 달랐다. 가문의 기둥이자 대들보라고 아들을 한 수 더 쳐준 것이다.

그런 아들 녀석이 울산 학성고 2학년일 때 진로를 제 적성과는 달리 인문계열로 바꾸었다. 가장인 필자의 황소고집 때문이었다. 그래도 연세대 법대에 진학한 아들은 운 좋게도 3학년 때 사법고시에 합격했고, 졸업에 필요한 출석점수를 따려다 보니 사법연수원 입교는 1년이 늦어졌다. 천운이랄까, 동기들보다 1년 늦어진 덕분에 아들은 후배뻘인 여학생을 아내로 맞게 됐다. 졸지에 우리 집안에 율사(律士)가 두 명이나 생겼으니 이것이 횡재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인생사에 어찌 꽃길만 있겠는가. 아비가 노안으로 돋보기를 쓰는 나이가 되다 보니 문득 나의 목을 조였던 욕된 부분도 생각이 나고 이것을 되새김질하며 값진 교훈이라도 얻을까 한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도 그랬지만 입학 후에도 아이의 눈이 짝짝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4학년 새 학기가 된 어느 날, 담임선생이 아내 크산티페한테 전화로 일러주었다. 아들 진흠이가 “흑판 글씨가 희미하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화들짝 놀라 아이와 함께 월성원자력 사택에서 택시를 타고 30km쯤 떨어진 울산의 안과 전문병원으로 달려갔다. 검진을 받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크산티페가 전해준 얘기는 이랬다.

“한쪽 시력은 1.5로 정상이나 반대쪽은 0.1 이하다. 쉽게 말하면, 갓난아이 수준의 시력이고 발육 부진에 기인한 것이다. 더 불행한 것은, 이미 늦어서 회복 불능이라는 점이다.” 부모의 무지함이 아이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후회와 자괴감에 마음이 처참히 무너져 내렸지만, 차는 이미 떠난 뒤였다.

딸아이가 고등학교 시절 피아노를 전공한답시고 연습에 몰두할 때의 일화다. 어릴 때부터 이른바 ‘절대음감‘을 조금은 타고난 모양인지 지도 교사나 이웃 분들이 곧잘 칭찬을 해주곤 했다. 아비는 막걸리 집 젓가락 장단에 일가견을 가진 게 고작인데, 딸아이는 피아니스트가 목표라니…. 이 무슨 삼시랑에라도 잡혔나 해서 온 집안이 초비상이었고, 아파트 아래윗집도 피아노 연습 소리에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급기야는 다니던 교회의 자투리 시간대에 매달릴 수밖에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부족한 연습시간에 안달이 난 딸은 스트레스만 눈덩이처럼 쌓여가는 눈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세계적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가 재능기부 성격의 지방 순회공연 일정에 따라 울산에 오게 된 것이다. 일부러라도 시간과 돈을 내서라도 서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판에 이런 운수대통이…. 조금도 망설임 없이 딸과 아내를 위해 거금(?)을 쾌척하기로 했다.

연주회가 시작된 지 반 시간쯤이 지나 도착해보니, 문지기도 없어서 공짜로 들어가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공연장 내부는 대충 이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대 중앙에는 피아노 1대와 연주자가 있었고, 관객은 1층 앞 좌석 가운데만 오밀조밀 몰려있었다. 2층은 텅 빈 공간뿐이었고, 대낮같이 밝은 내부조명이 썰렁한 분위기를 한층 더 부채질하는 듯했다.

그분의 연주에는 쉼표가 없었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연주보다 엉뚱한 잡생각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변이 일어났다. 연주자의 손이 건반 위를 뛰어다니는가 싶더니 이내 춤추듯 날아다니는 게 아닌가. 악보도 없이 내리 2시간 가까이 건반에 매달리다니! 평생 연습의 보람이거나 천부적 재능으로 입신의 경지에 오른 덕분이거나…. 감격은 일순 정신까지 혼미하게 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이 만든다고 했던가!

돌아오는 길에 우리 식구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딸아이가 음악이 아닌 간호학 전공으로 진로를 바꾼 것은 그다음 날이었다. 신의 한 수였다. 실물교육을 펼쳐주신 천재음악가, 피아노 거장(巨匠)의 노고에 새삼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딸이 지금은 대형 병원 수간호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니, 이 또한 나의 홍복(洪福)이 아니겠는가.

박재준 에이원공업사 사장·NCN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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