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희의 감성수필] 벚꽃, 마주하다
[유서희의 감성수필] 벚꽃, 마주하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3.17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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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닥또닥 비가 온다. 아직 여린 보문호수의 수양버들은 바람을 타며 물결 악보를 그린다. 한 쌍의 오리가 호수로 뛰어드는 빗방울을 쫓아 자맥질하며 새봄을 길어 올린다.

차창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친구 삼아 경주로 향했다. 비가 내리는 탓이었을까. 촘촘하게 짜였던 일정과 점심 약속마저 한순간에 취소되었다. 소복하던 꽃송이가 비바람에 후드득 떨군 가지처럼 하루가 앙상해졌다. 산허리까지 내려온 먹구름마저 답답하다고 느낄 때 여명처럼 벚꽃이 떠올랐다.

봄의 절정은 벚꽃이 아닐까. 아지랑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면 벚꽃은 천지에 핑크빛 융단을 펼쳐 가슴마다 꽃등을 밝힌다. 꽃잎이 개화를 시작하면 각양각색의 상춘객들은 벚꽃 명소를 찾아 축제를 즐기며 연분홍 꽃 빛으로 물든다. 봄까치꽃, 냉이꽃, 광대나물꽃……. 수많은 봄꽃 중 화사함을 대표하는 것은 벚꽃일 것이다. 면사포 쓴 신부의 모습으로 뭇 연인들에게 사랑의 마법을 걸어 별보다 반짝이는 봄밤을 수놓는 벚꽃을 봄의 여신이라 불러 본다.

봄은 파릇한 생명력을 전하지만 나에게는 연례행사처럼 봄앓이를 하는 계절이었다. 철쭉이 유난히 붉게 피었던 그해, 오빠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부모님도 해를 달리하며 꽃이 만발한 봄날에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때아닌 소나기에 천둥 번개를 맞다 보니 아픔은 점점 무디어졌다. 상처가 덧나도 꾹꾹 눌렀다. 어느 날, 길 위를 구르는 벚꽃에 심장이 찔렸다. 그것은 꽃잎이 아닌, 가족과의 이별을 겪으며 생긴 균열로 조각난 상처들이었다. 가엽고 애처로운 상처의 조각들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나를 보듬기로 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몇 해 전, 벚꽃 궁을 발견했다. 키 큰 벚나무들이 군락을 이루어 어깨를 맞대어 꽃 지붕을 잇고 가지마다 꽃송이들이 만발했다. 기쁜 나머지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벅찬 환희였다. 그 속에 들어가 둘러보니 온통 꽃 천지였다. 꽃잎의 모양, 색깔,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들여다보노라면 어느 사이 그것들과 동화되어 망각의 강을 건넜다. 바위같이 누르고 있던 근심과 고뇌는 까맣게 잊고 꽃 궁(宮)에서 말갛게 씻긴 봄을 만났다.

시인은 벚꽃 그늘에 앉으면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도 가벼워질 거라고 했다. 내 삶도 그렇게 벚꽃 그늘에서 조금씩 안식을 찾아갔다. 사랑도 미움도 벗어 놓고 청정하게 앉으면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질 것이라는 시 구절을 꾹꾹 눌러쓰고 읊으며 나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내려놓는 연습을 하며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기를 바라며 새봄 만나기를 기도했다.

봄비를 맞는 꽃망울이 봉긋봉긋 꽃잎 밀어 올리는 소리를 들으며 보문호숫가의 카페에 들어갔다. 호수의 잔잔한 물결과 연노랑 수양버들과 가지마다 어린 봄을 달고 있는 벚나무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 되는 창가에 앉았다. 비 덕분에 한산하여 포토 존에 앉는 행운까지 안았다. 벚나무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대면하니 낯설었다. 고목의 줄기를 따라가다가 옹이를 본다. 상처 아문 자리가 볼품없지만 그도 한때는 힘껏 꽃물을 밀어 올렸을 것이다. 상처 없는 생이 있으랴. 나무도 모진 비바람 견딘 꽃이 예쁘듯이 상처는 아름다움을 빚는 원천일 것이다.

수양벚나무가 호수를 건너는 바람에 몸을 맡긴다. 물결도 유유하다. 거스르지 않고 바람이 부는 대로 내어 맡기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굵직한 벚나무는 가지 없는 줄기에도 앙증맞은 꽃망울을 피우고 있다. 머지않아 기지개를 켜며 연분홍 꽃잎으로 새봄을 피우리라. 벚꽃 몽우리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나와 마주한다. 새봄, 벙글다.

유서희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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