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새가 노래하는 곳-12
울새가 노래하는 곳-12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3.14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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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원 작가와 함께하는 ‘책 한 권 울새가 노래하는 문학의 숲길을 따라’]
supil49@naver.com

언니는 불만으로 채워진 듯한 목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건 봉사도 효도도 아니야. 완전 희생이지.”

갑자기 방 안 공기가 무중력 상태처럼 느껴졌다.

“나도 다 생각이 있어. 공기 좋고 물 좋은 산속에 들어가서 암에 좋다는 약초를 캐 먹고 삼 년만 잘 견디면 틀림없이 너희 어머니의 몸도 곧 회복될 것이야. 점식이 아우가 그랬던 것처럼.”

언니가 또 불쑥 말을 내뱉었다.

“점식이 삼촌의 경우는 의사도 기적이라고 했다면서요.”

“그래. 맞아. 기적.”

“흥. 기적이 뭐 아무한테나 일어나나.”

갑자기 방 안 공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했다. 다섯 살이나 어린 내가 봐도 언니는 도무지 철이 없는 건지, 이기적인 건지 알 수 없었다. 언니는 때와 장소에 따라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 언니에 비하면 나는 내가 생각해도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주위를 둘러싼 분위기를 읽는 감각이 타고난 것 같았다. 물론 나 역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당분간 학교를 못 다니게 된 것에 따르는 절망은 있었다.

“너희 어머니가 건강만 되찾게 되면 다시 서울로 올 생각이야.”

점점 가라앉은 듯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순간 우리가 앉아 있는 지하 방 안의 분위기마저 깊은 지하로 가라앉는 듯했다.

어머니의 몸은 두 차례 수술을 받고 나서부터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현대의학을 믿지 않았다.

“도대체 오늘날 현대의학이 이루어놓은 게 아무것도 없어. 고혈압이며 당뇨, 암, 어느 것 하나도 고치질 못해. 너희 엄마만 해도 그래. 자궁암으로 두 차례나 수술을 받았는데도 결과가 어땠어. 결국 대장까지 전이되고 말았잖아. 그 양약이란 것도 그래. 일시적으로 풍선이 터지지 못하도록 누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내가 보기엔 현대의학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기술은 아직 없다고 봐. 흥! 더러 있긴 하지. 부러진 뼈를 붙이고 찢어진 곳을 꿰매는 일. 그것 말고는 현대의학이 해놓은 게 아무것도 없어.”

잠깐 방안에 정적이 채워지는 듯했다. 잠시 후, 아버지가 그 정적을 깼다.

“삼천 년 전 현대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가 음식으로 고치지 못하는 병은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고 한 말은 지금도 진리야.”

언니가 또 끼어들었다.

“히포크라테스가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한 건 맞지만 결국 그 자신도 병으로 죽고 말았어. 그러고 아빠! 삼천 년은 아니야. 내가 알기로는 B.C. 오륙백…….”

그때까지 줄곧 고개만 떨군 상태에서 말없이 앉아 있기만 하던 작은오빠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서 말을 했다.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해!”

아버지가 점식이 삼촌의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해 보인다고 나는 생각했다. 점식이 삼촌이 약초꾼이 된 이유도 다르지 않았다. 물론 운이 좋아 그럴 수도 있었겠으나 암을 앓고 있던 점식이 삼촌이 산속에 들어가 살면서 이것저것 몸에 좋다고 하는 약초를 캐 먹고 나서부터 차츰 건강이 회복되었던 건 사실이었다.

결국 아버지가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은 암에 걸린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자식들에게 삼 년만 효도든, 봉사든 해 달라는 것이었다.

머릿속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고 있을 때였다. 작은오빠가 손을 뒤로 뻗어 내 어깨를 툭 치는 바람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때 차가 멈췄고 길 건너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 중년 남자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가고 있었다. 얼핏 머리에 가발을 쓴 듯 보이는 남자의 손에는 까만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으나 남자는 지팡이에 의지하고 걷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때마침 털이 하얀 개가 나타나서는 남자 앞을 왔다 갔다했다. 당황한 남자가 들고 있던 지팡이로 개의 옆구리를 가볍게 밀쳤다. 하필이면 그때 바람이 거세게 불어온 탓에 남자가 쓰고 있던 가발이 공중으로 날았다. 그 순간 남자의 민머리가 탈처럼 보였다. 남자는 당황한 나머지 들고 있던 지팡이로 공중에 떠 있던 가발을 낚아채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놓치고 말았다.

빵빵거리는 자동차 소리 때문에 개가 불안했던지 땅바닥에 구르고 있던 가발을 덥석 물고는 인도 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 광경을 지켜본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모습을 보게 된 작은오빠가 손으로 남자와 개를 번갈아 가리키며 킬킬거렸다. 나 역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작은오빠와 나는 잠이 들어있는 어머니와 언니에게 들리지 않게 하려고 애써 작은 소리로 웃었다. 웃는 소리가 자꾸만 커지자 작은오빠와 나는 동시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 우스워서 배를 쥐고 웃었고 너무 웃다가 기침이 자꾸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나중에는 서로 얼굴만 쳐다봐도 웃음보가 빵 터질 정도였다. 너무 웃다 끝내 숨이 턱까지 차올라 괴롭기까지 했다. 웃느라 작은오빠와 나는 신호등에 파란불이 켜져 있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그런 탓에 뒤에 있던 차들이 일제히 빵빵거렸고 빵빵거리는 소리의 파장이 아스콘으로 덮여있는 도로 위로 넓게 퍼져나갔다. 작은오빠가 손을 들어 뒤의 차들을 향해 미안하다는 신호를 해 보이고는 곧 차를 몰았다. ▶13화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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