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향기] 독 우는 소리 (下)
[아침향기] 독 우는 소리 (下)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3.13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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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다시 집에 들르신 친정어머니는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내 손을 끌고 장독대로 가셨다.

“내 말을 귀담아서 잘 들어라. 지금 네 눈에는 울퉁불퉁한 게 우습게 보일지는 몰라도 이런 독에 담근 장맛을 보면 너도 놀랄 거다. 이 숨구멍 좀 봐. 사람만 코로 숨 쉬는 줄 알재. 독도 숨을 쉬는 코가 있거든. 코로 공기가 들락거려야 장이 푹 익지. 저렇게 유약을 발라서 기생오라비처럼 겉만 뻔지르르한 독은 콧구멍이 없어서 숨을 못 쉰다고.”

어머니의 말씀은 정확했다. 그해 장맛은 꿀맛이었다.

그때부터 독은 셋방에서 내 집으로,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전전해오면서 삼십 년 넘게 나와 함께 보냈다. 그동안 독은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봄이면 어김없이 장을 담았고 여름엔 소금을, 가을엔 김장을, 겨울에는 쌀을 담았다. 그랬던 독과 이별해야 하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인데 이제 누구도 이 독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슬프게 했다.

막내딸이 인터넷에 올려놓고 기다려 보자고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물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독도 이런 내 마음을 알았던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문득 독 안에다 모레를 가득 담아 단지 내 공원에다 놓아두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재떨이로 요긴하게 쓰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아파트관리실 사람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을 내저었다. 또다시 알고 지내던 식당 주인을 찾아가 물어보았으나 허사였다. 힘없는 발걸음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언젠가 이 독을 유배시켰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이사를 자주 다니게 되었다. 그런 사정을 잘 안 이웃 할머니 한 분이 덩치 큰 옹기는 자주 옮겨 다니다 보면 깨뜨릴 수 있을지 모르니 당신네 지하실에 두라고 하셨다. 그때부터 일 년 가까이 이 독을 지하실에다 두게 되었다. 당시 독 안에는 장을 가득 담아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바쁘게 지내다 보니 그만 그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다.

그해 가을이 되어서야 그 생각이 났다. 변질된 장을 퍼서 버리려고 미리부터 들통과 고무장갑을 준비해 지하실로 갔다. 뚜껑을 열고 보니 예상했던 대로 독 안에는 솜이불을 덮어놓은 것처럼 곰팡이가 가득 덮여 있었다. 그런데 곰팡이를 걷어내자 놀랍게도 단내가 진동했다. 햇볕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에서도 코로 숨을 쉬는 독이 장을 품어주었던 것이었다.

마침내 이사하는 날이 되었다. 독 안에 담긴 장을 여동생과 결혼한 큰딸애에게 줄 몫으로 나누어 담아 두었다. 속을 다 내어준 독은 텅 빈 상태였다. 독은 우리 어머니의 일생처럼 자신의 속을 평생토록 비워내야 하는 운명을 지닌 것 같았다. 어머니도 여섯 남매를 키우시느라 늘 자신의 속을 아낌없이 퍼내 주셨으리라.

언제나 자신을 스스로 비워내며 베풀 수 있을는지. 아쉬움에 손으로 독을 어루만져 보았다. 오늘따라 손바닥에 밀착되는 우툴두툴한 촉감이 더없이 정겹게 느껴졌다.

엊그제 경비아저씨를 찾아가서 독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물어보았다. 그는 망치로 깨뜨려서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삿짐을 내릴 때 망치를 가지고 오겠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오늘 아침 약속대로 경비아저씨가 망치를 들고 찾아와서는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독을 눕혔다. 그러고는 망치로 땅, 땅, 땅, 내리치자 독이 쩌르렁 쩌르렁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경비아저씨의 손에 들려있는 망치를 빼앗았다.

다행히 독은 깨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독을 이삿짐 트럭에 싣기로 했다. 트럭에 올라앉은 독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그래. 우리 한번 갈 때까지 같이 가 보자꾸나.”

최정원 <울새가 노래하는 곳> 지은이·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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