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원 작가와 함께하는 ‘책 한 권 울새가 노래하는 문학의 숲길을 따라’] 울새가 노래하는 곳-10
[최정원 작가와 함께하는 ‘책 한 권 울새가 노래하는 문학의 숲길을 따라’] 울새가 노래하는 곳-10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3.08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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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il49@naver.com

그때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던 붉은노을과 산 위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하늘 높이 날고 있는 산새들의 날갯짓 그리고 그 산새들이 지저귀는 노랫소리……. 언제 절집 행랑채에 불이 났느냐는 듯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산속의 일상이 전에 없이 놀랍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우연히 점식이 삼촌과 만나게 되었다. 아직도 점식이 삼촌의 얼굴은 절집행랑채에 불이 난 것에 대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때 점식이 삼촌으로부터 듣게 된 불이 났을 때의 상황을 요약하면 대충 이랬다.

사람들이 언덕을 다 올라와 옥수수밭 모퉁이로 막 돌아섰을 땐 이미 절집 행랑채 쪽에서 시커먼 연기가 솟아나고 있었다.

“절집이다!”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또 누군가는 “절집 행랑채에서 불이 났어!” 단정 지었다. 맨 먼저 모르는 트럭 하나가 사람 몇을 태우고 무서운 속력으로 달리고 있었고, 그 뒤로 소방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따라갔다. 소방차가 화재 현장 가까이 왔을 때만 해도 불을 꺼야한다는 사람들의 열기는 불보다 더 뜨거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소방차도, 트럭도 모두 화재현장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찻길에서 절집으로 들어가는 길 폭이 좁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힘을 모아 옹달샘을 통째로 퍼부어서라도 불을 꺼보려고 했으나 그런 판단은 곧 바뀌었다. 다 타도록 그냥 놔두기로 결론이 났다. 이미 게딱지만 한 행랑채가 다 타버린 데다 가치도 대단치 않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둘러서서 불탄 행랑채를 바라보며 저마다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기도 했고, 낮은 소리로 지난번 행운 펜션 천막 안에서 손님들이 고기를 굽다 불을 냈을 때를 포함해서 그동안 몇 번 있었던 산불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만약 절집 마당으로 들어가는 돌담 모퉁이의 길폭이 한 뼘만 더 넓었더라면 소방차가 들어가서 빨리 불을 끌 수도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막상 있는 힘을 다해 달려오긴 했으나 불이 난 현장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트럭과 소방차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언덕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고, 그 뒤를 사람들 몇이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갔다. 행랑채에 불이 활활 타오르던 그 순간에 안채에서 그와 내가 불보다 더 뜨거운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가 얼굴을 내 가슴에 묻고 있을 때 먼 거리에서 소방차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앵앵거리며 달려오고 있던 소방차 소리와 사람들이 불이야! 하고 소리치며 달려오는 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그때 나는 골짜기 너머 북쪽에서 산불이 난 줄로만 알았다. 전에도 산불이 났을 때면 아랫마을 사람들이든 등산객이든 개의치 않고 달려가곤 했으니까. 

그날 밤, 나는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아침이 될때까지 벽을 지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낮에 절집에서 있었던 엄청난 사건들이 현실이 아닌 꿈속의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현실에 있었던 일인지 그냥 꿈에 불과한 일인지 확인하고 싶어 나는 내 살을 꼬집어보기도 했다.

날이 훤히 밝아오면서부터는 엄습해오는 어떤 허탈감에 젖어있었다. 허탈감이라고 하는 그 말속에 그가 나를 무시했다거나 나 자신의 태도에 대해 후회의 의미가 담겨 있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벽을 지고 앉은 상태에서 나는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잠결인지 꿈결인지 그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던 향긋한 샴푸 냄새와 그의 목덜미에서 맡아지던 야릇한 남자의 살냄새가 아직도 몸안에서 은은하게 느껴졌다.

이튿날 아침 풍경은 어제와 다름없었다. 아버지와 나는 통나무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괜스레 나는 눈길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난감했다. 갑자기 아버지가 어제 절집에 불이 난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 절집 행랑채에서 불이 났다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안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른다고 말할 수도 없어서 그냥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행랑채 천장에 연결된 낡은 전선에서 불똥이 튀었다지. 때마침 집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고. 그런데 개가 불에 타 죽었다더군. 아무리 짐승이지만 참으로 애석한 일이야. 무엇보다 진실이 네가 그 시간에 절집에 안간 건 천만다행이야."

아버지는 아직도 내가 어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불이 난 순간에 불같이 뜨거운 사랑을 한 나를 말이다. 왠지 나는 죄인 인양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밥만 꾸역꾸역 퍼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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