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원 작가와 함께하는 ‘책 한 권 울새가 노래하는 문학의 숲길을 따라’] 울새가 노래하는 곳-9
[최정원 작가와 함께하는 ‘책 한 권 울새가 노래하는 문학의 숲길을 따라’] 울새가 노래하는 곳-9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3.05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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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il49@naver.com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봐. 내가 처음 기타를 배울 때 영국 민요인 ‘즐거운 나의 집’이란 곡을 치면서 노래도 불렀지. 그 노랫말 가운데‘나의 집’이란 말이 자주 나오거든. 그때 곁에 앉아 계시던 외할아버지가 호통을 치셨어.”

“왜?”

“녀석아, 네 집이 어딨어서 자꾸만 나의 집, 나의 집, 하는 거냐. 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한국 사람은 말이다. ‘나’라는 개체보다는 ‘우리’라는 집단을 더 좋아하지. 그러기에 우리나라, 우리 고향, 우리 동네, 우리 학교, 우리 친구 하지 않더냐. 하시는 거야. 외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보니 너와 나라고 하는 개체보다 집단을 뜻하는 우리란 말이 더 정겹게 느껴지긴 하더라고.”

잠시 후, 그가 구석에 세워져 있던 기타를 가져왔다.

“기타는 할머니 댁에 와서 처음 치기 시작했어. 완전 독학이야. 그래서 잘 치지는 못해. 그런데 기타는 정말 좋아. 소리가 요란하지도 않고 뭐랄까. 정겨운 친구 같다고 할까. 엉성하지만 몇 곡은 칠 수 있어. 내가 요즘 즐겨 치는 건 ‘굿바이 데이’란 곡이야.”

그가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기타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듯 익숙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 가족이 서울에서 살 때 작은오빠도 가끔 기타를 치곤 했는데 이따금 ‘굿바이 데이’란 곡을 들려주었던 것 같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앉아서 그가 치는 기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그가 손을 흔들어 내 얼굴 주위에서 날고 있던 파리를 쫓다 상체가 기울어 기타 줄이 제멋대로 흔들리게 되면서 불협화음이 났다. 그가 상체를 바로 하려 했을 때 그의 어깨와 내 어깨가 살짝 부딪쳤다. 소름이 끼치도록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가 갑자기 손으로 내 턱을 받치고 사랑스런 아기에게 하듯 내 뺨에 가볍게 입술을 갖다 댔다. 곧 그는 내 입술에 열정적으로 키스했다. 그의 숨결에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열기에 나도 모르게 내 몸이 활처럼 구부러졌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천천히 내가 입고 있던 카디건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작고 둥근 모양의 단추는 모두 여섯 개였다. 나는 그의 손이 단추를 하나씩 벗겨내는 모습을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여섯 개째 단추에 닿게 되는 순간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마침내 카디건 틈으로 하얗고 봉긋한 가슴이 드러났다. 곧 그는 자신의 얼굴을 내 가슴에 묻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하필이면 그 순간에 절집 아니, 그의 외할머니네 행랑채에서 연기가 조금씩 솟아 올라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은 점점 번졌고 우우우 소리를 내는 불길은 성난 짐승처럼 울어댔다. 타닥타닥 나무 기둥과 서까래가 타는 소리 속에서 후끈후끈한 불기운이 마당을 가득 채웠다. 그때 행랑채 기둥에 목줄이 묶여있던 개가 뜨거운 불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미친 듯이 짖어대기 시작했다. 때마침 바람이 거세게 불어와 작은 불씨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개집에까지 불이 옮겨붙게 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개가 불에 타서 죽어가고 있던 순간에 그의 몸은 마치 물속을 무자맥질하듯 떴다 가라앉았다 반복하면서 내 몸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의 행동은 난폭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첫 경험을 하는 소녀답지 않게 황홀한 우주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마침내 소방차가 출동했으나 길이 워낙 좁은 탓에 절집 마당에까지는 들어오질 못했다. 곧 두 명의 소방관이 소화기를 들고 달려왔고 아랫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지나가던 등산객까지 달려와 준 덕분에 다행히 불은 이내 잡혔고 안채에까지 번지는 일도 없었다. 소방관 한 명이 잔불을 다 끄고 나서 우리가 있는 안채 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제법 큰 소리로 말했다.

“계십니까?”

순간 우리는 동시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던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아, 어떻게!”

“쉿!”

그가 손가락 두 개를 입술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해 보였다. 소방관이 또 한 차례 말을 했다.

“안에 아무도 안 계십니까.”

갑자기 내 심장이 들썩들썩 뛰었다. 나는 숨을 길게 한 차례 내쉬고 나서 아까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저 소방관이 우리가 방에 있는 걸 아나 봐.”

“설마.”

“아무래도 소방관이 댓돌 위에 나란히 놓아둔 신발 두 켤레를 본 모양이야.”

우리는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있기도 난감했다. 때마침 어디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나더니 소방관이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내 입에서 한숨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휴!”

그때까지 눈을 열쇠 구멍에 박고 있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아직 나가면 안 돼. 또 다른 소방관 한 명이 잿더미에다 대고 오줌을 누고 있어. 무지 참았던 모양이야. 오줌 소리가 소방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소리 같아. 이리 와서 너도 한번 봐.”

“그건 아니지. 소방관 아저씨가 소변보는 걸 내가 뭣 하러 봐.”

“거기를 보라는 말이 아니고 행랑채 쪽을 보라는 거지. 내 말은.”

나는 눈을 문틈에 박고서 밖을 내다봤다. 오줌을 다 눈 소방관이 대문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때야 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검은 연기가 마당을 채우고 있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오자 연기가 조금씩 사라지는 듯했다. 매캐한 냄새가 목구멍까지 들어온 탓에 우리는 번갈아 가며 기침을 했다. 이미 행랑채는 잿더미로 변해 있었고 그 위로 잿빛 먼지가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또 한차례 바람이 불어왔고 잿빛 연기는 마당으로 내려앉지 않고 하늘가로 사라져갔다. 그때서야 털이 하얀 개가 새까맣게 그을린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내가 울먹이며 말을 했다.

“어떻게 해. 개가 불에 타서 죽었나 봐.”

별안간 그가 무릎을 꿇고 앉더니 축 늘어진 개를 끌어안고 흐느꼈다. 나는 그의 어깨만 토닥여줄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우리는 개의 사체를 거두어 능선으로 올라갔다. 따스한 햇볕이 비치는 고사리밭 한 모퉁이에 땅을 파서 개의 사체를 묻어주었다. 그러고 능선을 내려오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고개를 돌려 개의 무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능선을 다 내려왔을 때 그가 말했다.

“우리는 왜 행랑채에서 불이 난 줄을 몰랐을까.”

“불은 언어가 없으니까.”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세상 만물은 저마다의 언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면 불도 언어가 있다는 말인데 그게 말이 돼?”

“말이 되지.”

“이럴 테면 어떤 언어?”

“타닥타닥.”

“그럼 비는?”

“보슬비는 보슬보슬, 소나기는 촤르르.”

“눈은?”

“뽀드득”

“그건 아니라고 봐. 그건 우리가 눈을 밟았을 때 발과 눈이 동시에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일 뿐. 눈이 독립적으로 내는 소리는 아니지.”

“그럼 펑펑 혹은 소복소복.”

“하하하.”

“호호호.”

결코 웃을 일이 아니었으나 우리는 소리 내 웃고 말았다.

▶10화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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