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덕의 역사칼럼]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④
[배종덕의 역사칼럼]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④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3.05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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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제는 고구려와의 1차 전쟁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이후 요해, 즉 발해에서 전쟁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장졸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 주라는 ‘수장요해전망조(收葬遼海戰亡詔)’를 내렸다. 수나라 군대가 한반도에서 싸우다가 죽었다면 수양제가 어떻게 ‘발해에서 싸우다 죽은 장졸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 주라’는 조서를 내렸겠는가?

당태종은 고구려 친정(親征)에 나서면서 그가 손수 작성한 수조(手詔)에서 ‘요수와 갈석산에 가서 재를 묻겠다’고 했다. 남북조시대의 대표적 학자 유신(庾信)은 요수를 가리켜 ‘하북성 남쪽 보정시(保定市) 역현(易縣)의 역수(易水)’라고 했고 「사기(史記)」의 ‘소진열전(蘇秦列傳)’에는 ‘역수 유역에 갈석산이 있다’고 했다.

당태종이 ‘요수와 갈석산에 가서 죄를 묻겠다’고 한 것을 볼 때 당시 고구려의 서쪽 강역은 오늘날 하북성 보정시 역현의 역수 유역 백석산 일대에 걸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또한 남송 때 학자 왕응린(王應麟 1233~2 96)은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에서 ‘당나라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하북성 창려현(昌黎縣)에 설치되었다’고 말했다.

오늘날은 우리 민족이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송대 이전의 중국 문헌에 의하면 고조선과 고구려 시대에는 하북성 남쪽 역수 유역을 경계로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였고 북경지역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중국의 수도 북경은 역사적으로 한국 영토의 일부였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시진핑 주석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답변해주기 바란다.

셋째, 일본은 대만을 50년 동안 통치했고, 중국 또한 한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아무도 대만이나 중국이 역사적으로 일본의 일부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아베가 트럼프를 만나 대만과 중국이 역사적으로 일본의 일부였다며 역사적 주권을 제기한다면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시 주석은 동북공정에 의해 날조된 역사 인식에 기초해 미·중 정상회담에서 한국이 중국의 일부였다는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을 함으로써 한국인의 권위와 한국의 국격을 세계적으로 추락시켰다. 이것이 과연 우방의 국가지도자로서 정당한 발언이었다고 생각하는지 답변해주기 바란다.

넷째, 시 주석은 혹시 명청(明淸) 시대의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망언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일찍이 고아가 되어 머슴살이와 승려 노릇을 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중국의 황제가 된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은 그의 증조부 이상의 선조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주원장은 오히려 동이계(東夷系)의 혈통을 이어받은 인물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주원장이 한족(漢族)이고 명나라가 한족 국가라고 주장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리고 청나라의 뿌리는 금(金)나라였고 금나라의 뿌리는 신라에 닿아 있다. 신라인 김함보(金函普)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阿骨打)의 시조라는 사실이 「금사(金史)」 본기(本紀)에 수록되어 있다. 시 주석의 논법에 따르면 중국의 청나라는 신라의 일부였다는 논리의 성립이 가능하다고 보는데 이 점에 대해 시 주석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답변을 듣고 싶다.

다섯째, 오늘의 중국 역사는 한족의 역사가 아니라 화하족(華夏族)과 동이족(東夷族)이 공동으로 이룩한 역사이다. 화하족과 동이족은 동과 서로 나뉘어 두 축을 형성하면서 중국 역사를 이끌어왔다. 이 양자 중에 중국 역사의 시원은 어디이며 원조는 누구인가?

▶⑤로 이어짐

배종덕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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