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원 작가와 함께하는 ‘책 한 권 울새가 노래하는 문학의 숲길을 따라’] 울새가 노래하는 곳 -8
[최정원 작가와 함께하는 ‘책 한 권 울새가 노래하는 문학의 숲길을 따라’] 울새가 노래하는 곳 -8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2.27 20: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supil49@naver.com

“아! 안타깝다.”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런 말도 있다는 거지.”

나도 이 시는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런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며 내가 말했다.

“왜 이름이 약산일까. 혹 약초가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그럴 수도 있을 거야.”

“혹시 북쪽은 진달래꽃을 나름 국화로 치나?”

“내가 알기론 목란인 걸로 알아.”

“목란보다는 진달래꽃이 훨씬 예쁘잖아. 만약 남과 북이 하나가 되면 진달래꽃을 국화로 하면 좋겠다. 누구나 다 좋아하는 꽃일 테니.”

“그건 곤란해.”

“왜?”

“국화는 그렇게 함부로 바꿀 수 있는 꽃이 아니야. 무궁화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영원히 피고 또 피어서 지지 않는 꽃이란 뜻을 지니고 있거든.”

“무궁화에 그런 뜻이 담겨 있었구나.”

“신라 때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낸 국서에서도 이미 신라를 근화향, 즉 무궁화의 나라라 일컬었고. 가끔 사극에서도 보았듯 조선 시대 때 과거에 급제하면 어사화라 하여 무궁화꽃을 머리에…… 현재도 가장 영예로운 훈장 역시 무궁화 대훈장이잖아. 애국가에도 무궁화 삼천리…….”

“결국 네 말의 핵심은 국화는 함부로 바꿀 수 있는 꽃이 아니다 이거지.”

“응. 맞아.”

“참, 고사리는 주로 어디에서 꺾어?”

“저기 보이는 음지쪽이 거의 다 고사리밭이라고 보면 돼.”

그는 잠시 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을 주고 나서 슬며시 팔을 뻗다 귀중한 예술작품을 다루듯 가만히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어느새 그의 손이 내 어깨선을 타고 내려와서는 슬며시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했다.

능선을 다 내려오고 나서부터 우리는 마을버스 정류장까지 뛰기 시작했다. 아쉽지만 그는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저만치 마을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휴대폰에 우리 집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나서 곧 마을버스에 올랐다. 잠시 후, 그가 차창 유리에 미소 지은 얼굴을 대고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의 옆모습을 보았다. 하얀 귀와 도톰한 볼 그리고 오뚝한 코가 차창 밖으로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영화 속에서 차를 타고 가다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연인을 향해 손을 흔드는 멋진 남자주인공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솔직히 말하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보다 그가 훨씬 더 멋있었다. 사흘 뒤 내가 고사리가 가득 들어있는 배낭을 메고 산에서 돌아왔을 때였다. 돌층계에는 작은 택배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집에 택배를 보내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낸 이의 이름부터 확인해 보았다. 손수호였다. 상자 안에는 손편지와 분홍색 케이스로 감싼 휴대폰이 같이 들어있었다. 나는 얼른 편지부터 펼쳐보았다.

‘잘 지냈어? 아무래도 너랑 자주 안부를 주고받으려면 집 전화보다는 휴대폰이 편리할 것 같아서… 내가 개통해 놓았으니 넌 이용하기만 하면 돼. 휴대폰을 받게 되면 문자부터 줘. 안녕!’

나는 편지와 휴대폰을 가슴에 끌어안고 한동안 돌층계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느새 집 앞 개울가에서는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려왔고 거뭇거뭇하던 벚나무에도 분홍 꽃망울이 올망졸망 맺혔다. 나는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 마당으로 나갔다.

앙증맞고 파릇파릇한 새 생명들이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새 생명들은 낙엽 더미도 뚫고 단단한 나무껍질도 뚫고, 돌 틈까지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머지않은 시기에 그가 올 거라고 기대를 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어 체념하는 사이 뜻밖에도 그가 찾아왔다.

“어떻게 왔어?”

“응. 학교 개교기념일과 주말이 이어졌어.”

그의 목소리는 막 돌 틈을 박차고 나온 파릇파릇한 새싹처럼 해맑고 산뜻했다. 반가운 마음에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아! 그랬구나.”

반가움도 잠시뿐.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절집에 불이 난 것이었다. 그날 오후, 내가 절집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그는 안채와 꽤 떨어진 곳에 자리한 행랑채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그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겼다.

“진실이. 어서 와.”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

“응. 물을 좀 마셨어.”

마름모꼴에 가까운 듯 보이는 옹달샘에는 맑은 물이 넘칠 듯 말 듯 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옹달샘 위로 감나무 가지가 춤을 추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여태 그곳에 옹달샘이 있는 줄은 알지 못했다. 매번 절집에 들렀을 땐 안채에만 머물다가 돌아오곤 했기 때문이었다.

“너도 한번 마셔봐. 물맛이 달아.”

“물맛이 달다고? 시원하다면 몰라도 물에서 단맛이 느껴진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데.”

그는 나무 꼬챙이로 마당에 글씨를 또박또박 썼다. 그때 그의 뒤로 보이는 행랑채 지붕 위에는 수탉 한 마리가 화려한 볏을 뽐내며 홰를 치며 울어댔고, 털이 하얀 개는 행랑채 기둥에 묶인 채 허공을 향해 짖어대고 있었다. 그는 글씨를 다 쓰고 나서 자상한 선생님처럼 손으로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왜 감로수란 말도 있잖아. 이리 와서 봐. 달 감 甘 이슬 로 露 물 수 水…….”

그러나 나는 퉁명스럽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나는 한자는 잘 몰라. 내 앞에서 유식한 척 좀 하지 마.”

“그렇게 생각했다면 미안. 나는 그냥 쉽게 설명하느라.”

“쉽긴. 더 어렵거든.”

“오늘따라 하늘이 이상하지. 그렇다고 비가 올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야.”

“그러게. 근데 왜 집이 이렇게 조용해.”

“응. 모처럼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모두 읍내로 나가셨어. 오늘이 장날이라고 하던데.”

“아. 맞다. 오늘이 장날이야.”

나도 앙증맞게 생긴 표주박으로 물을 떠서 마셨다. 물맛이 달다기보다는 우리 집 물보다는 좀 더 시원했다. 옹달샘 뒤쪽으로 빙 둘러쳐진 돌담에는 푸른빛이 도는 담쟁이넝쿨로 덮여있었다. 햇살이 비치자 담장은 온통 진홍색으로 물이 들었고 옹달샘 주위에는 파릇파릇한 풀이 돋아나 있었다. 불현듯 갑자기 하늘에는 검붉은 장미꽃다발 같은 구름 떼가 몰려왔다. 놀란 내가 그 구름 떼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가 바람이 차다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절집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말끔해 보이는 방 한구석에는 기타가 세워져 있었다.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며 내가 말했다.

“이 방에서 너랑 나랑 단둘이 앉아 있게 될 줄이야.”

“난 말이야. 너랑 나랑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우리라고 하면 더 좋을 것 같아.”

“나는 너랑 나랑이란 말이 더 정겹게 느껴지는 것 같은데.”

▶9화로 이어짐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