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김억이 생각난 까닭은
문득 김억이 생각난 까닭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2.27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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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머잖아 돌아올 3월, 온 산이 연분홍으로 물들어갈 때면 저절로 되뇌어지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다. 그리고 함께 떠오르는 인물이 김소월의 스승으로 알려진 ‘김억’이다.

하지만 세간엔 이 이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진 않다. 아마도 그의 친일(親日) 활동과 납북(拉北) 이력 때문일 게다. 필자도 여러 해 전에 예이츠(W. Yeats, 1865~1923)의 시를 읽기 전까진 김억에 대해 잘 몰랐다.

예이츠의 시 ‘He wishes for Cloths of Heaven(하늘나라 옷감)’에 ‘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 Enwrought with golden and silver light,//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란 구절이 있는데, 이를 김억이 1921년에 출간된 국내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懊惱)의 무도(舞蹈)’에서 ‘꿈길’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절묘하게 번역했다. ‘금실 은실로 짜여진/ 하늘나라의 옷감이 있다면/ 님의 발끝에 깔아드리오리다/ 님이여, 그 옷감을 사뿐히 밟고 가시옵소서’

다음은 김소월의 ‘진달래꽃’ 중 3연이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이 시가 1925년에 발표되었으니 상당 부분 스승인 김억의 영향을 받은 걸 알 수 있다. 김억이 궁금해졌다.

김억은 1894년에 평안북도 정주(定州) 태생으로, 1907년 오산학교(五山學校)에 들어가 1913년 졸업했다. 이후 1914년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문과에 진학했으나, 1916년 부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면서 오산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이때 김소월을 제자로 만난다. 교사로 재직하며 태서문예신보 등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번역하여 게재했고 창작시도 여러 편 발표했다.

이때 게재한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영미권 시들을 모은 것이 ‘오뇌의 무도’이다. 이밖에도 인도 시인 타고르(R. Tagore)의 시집 ‘기탄잘리’를 번역하여 발간하기도 했다. 당시 지식인들이 열광했던 시들인데, 구미(歐美)에 유학을 간 적도 없고 더구나 불어(佛語)를 배운 적도 없는 김억이 영어판과 일어판을 대조해가며 창작에 가까운 번역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열정과 천재성이 짐작된다.

이번엔 김억의 창작시 ‘봄은 간다’를 감상해 보자. ‘밤이도다/ 봄이다// 밤만도 애달픈데/ 봄만도 생각인데// 깊은 생각은 아득이는데/ 저 바람에 새가 슬피 운다// 검은 내 떠돈다 / 종소리 빗긴다 //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 님은 탄식한다.’

내친김에 그의 대표작이자 가곡으로도 작곡된 ‘물레’의 첫 연도 감상해 보자.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어제도 오늘도 흥겨이 돌아도/ 사람의 한 생은 시름에 돈다오.’

번역시집에 이어 그의 창작시를 모은 한국 최초의 근대시집 ‘해파리의 노래’를 발간하는 등 왕성하게 번역과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한편, 특이한 활동도 하나 병행한다. 다름 아닌 ‘세계어학회’란 걸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활동했는데, 만국 공용어인 ‘에스페란토어’ 보급 운동을 한 것이다.

여기엔 많은 평가가 엇갈리는데 대체로 일본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맞서기 위한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김억의 또 다른 업적 중 하나는 제자 김소월의 시를 모아 출간한 일이다. 김소월이 채 꽃피기도 전에 요절했으므로 지금의 김소월이 있게 한 장본인이 김억이었던 것이다.

이러던 그가 1937년 전후로 친일지식인으로 변절한다. 어떤 이유인지는 여러 사료를 찾아봐도 명확하진 않다. 그러나 그의 친일 행각은 참으로 끔찍했다. 종군간호부를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각종 친일단체의 주요 직책을 맡으며 일본군과 일왕을 찬양하고 조선인 징용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글을 남발했다. 심지어 가미카제로 억울하게 죽은 조선징용군을 미화하는 글까지 써댔다.

항일애국의 달인 3월을 앞두고 김억의 엇갈린 행적을 돌아보니 씁쓸하기 그지없다. 그러다 총선을 앞두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진영을 넘나드는 무수한 정치 철새들을 보니, 김억의 변절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옅어지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주) 대표이사·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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