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희의 감성수필] 돋움
[유서희의 감성수필] 돋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2.18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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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마를 갓 시작한 아기가 물건을 잡으려고 발끝을 세운다.

친구는 요즘 손자 자랑이 한창이다. 만나면 자연스럽게 동영상부터 보여준다. 며칠 전에는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다며 법석법석하다. 동영상 속의 아기는 두 팔을 앞으로 펼쳐 균형을 잡으며 오른발 왼발 걸음을 뗀다. 그러다 이번엔 대단한 것을 발견한 듯 눈을 반짝거리며 거실장이 있는 곳으로 간다. 위에 놓인 물건들이 신기한 모양이다. 잡으려고 손을 뻗어 보지만 닿지 않자 발돋움을 한다.

돋움은 키를 돋우려고 발밑에 괴는 물건이기도 하지만, 노력하여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북돋워 주는 의미도 있다. 다른 가수의 노래나 연주가의 연주에 참여하여 일부분을 맡아 도와주는 ‘돋움 연주’, 사회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하는 ‘돋움 음악회’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돋움이다.

수묵 크로키 화가 석창우 화백은 젊은 나이에 전기 감전 사고로 두 팔을 잃어 의수를 해야만 했다. 하루는 네 살 된 아들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당황했지만 동화책 속의 새를 보고 그려 주었다. 그림을 본 가족들이 한목소리로 칭찬을 하자 화가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여러 곡절과 노력 끝에 이천이 년 월드컵 축구 장면을 비롯해 피겨 선수의 점프 장면, 그리고 소치 평창 패럴림픽 폐막식 등 동적인 장면을 수목 크로키 퍼포먼스로 선보였다. 가족의 응원이 그가 화가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돋움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초중고 교과서에 게재되어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꿈을 돋움해 주고 있다.

우리 집의 가훈은 ‘노력’이었다. 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자로 써진 글자와 밭을 일구는 소와 밀짚모자를 쓰고 소를 부리는 농부의 그림과 함께 대청마루 위에 걸려 있었다. 액자는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큼지막했다. 마당과 마루 그리고 집을 드나들 때도 들어왔다. 언제 어디에서든 볼 수 있어 가슴에 새겨졌다. 살면서 난관에 부딪힐 때면 각인되어 있던 가훈이 되살아나 포기하지 않고 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완벽해지려는 성격이 못마땅할 때도 있었지만, 매사에 끈기 있게 임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바람이 담긴 가훈이 돋움이 되어 준 덕분일 것이다.

아부틸론은 하루가 다르게 키를 키운다. 자라는 속도만큼 복주머니를 닮은 붉은 꽃송이를 피운다. 제 키를 지탱하지 못하고 휘어지는 것이 안쓰러워 지지대를 세워주었다. 가녀린 줄기가 꺾어지지 않고 위로 뻗어갈 수 있도록 돋움이 되어 주는 지지대의 어깨가 든든하다.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싶을 때면 그를 찾는다. 어쩌면 나보다 더 나를 아는 지기라 할 수 있겠다. 부족함이나 허물을 보여도 거리낌이 없다. 정반대의 성격으로 다투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 함께 해 왔기에 이제는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 주고 있다. 세상 물정에 어둡고 어리석어 상처받는 일이 생길 때면 그에게서 위로받으며 이치를 배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유장하게 흘러갈 수 있는 것은 지지대 같은 그의 돋움 덕분이다.

2월은 결심을 굳히기 좋은 달이라 한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세웠던 목표를 되짚어보기 좋은 시기이기이므로. 풀잎들의 기지개 켜는 소리와 꼬물꼬물 돋아나는 봄의 생명력을 느끼며, 느슨해진 목표를 다시 곧게 세워본다. 지금까지의 글쓰기가 연습이었다면 올해는 도전장을 내밀며 문학의 키를 높일 수 있도록 뒤꿈치를 힘껏 들어 올릴 것이다.

아기는 발꿈치로 키를 높여 거실장 위로 기어 올라갈 기세다. 팔을 뻗어 안간힘을 쓰다가 드디어 물건을 잡았다. 태어나 처음 스스로 해낸 만족감인지 환호성 같은 투레 소리를 낸다.

유서희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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