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새가 노래하는 곳 -6
울새가 노래하는 곳 -6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2.15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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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원 작가와 함께하는 ‘책 한 권 울새가 노래하는 문학의 숲길을 따라’]
supil49@naver.com

나는 어림잡아 4킬로미터 정도를 헤매고 돌아다녔던 것 같다. 하필이면 눈앞에는 가시덤불과 칡넝쿨이 뒤엉켜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될 수 있으면 그쪽을 피하려고 조심했으나 가시덤불과 칡넝쿨이 내 발목을 칭칭 감고 말았다.

가시덤불과 칡넝쿨에서 발을 빼내려고 할 때마다 그것들은 오히려 내 발목을 더욱 옭아맸다.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다.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승달은 구름 속에 모습을 감추었다 드러냈다를 반복했다. 저만치 철조망이 보였다. 푯말에는 빨간 페인트로 ‘출입금지’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 글자는 희미한 달빛 아래 잠깐 보였다가 사라졌다. 어디를 둘러봐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철조망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얼핏 그곳에서 서로 쫓고 쫓기고 있는 듯한 야생동물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였다. 어떤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짐승 소리 같기도 했고, 물소리 같기도 했다.

“저기요!”

아! 그것은 물소리도 짐승 소리도 아닌 사람의 소리였다.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요. 그쪽은 군사보호지역이라서 민간인이 함부로 들어가면 …….”

곧 작은 불빛 하나가 덤불을 헤치고 내게로 왔다. 하필이면 그 순간에 절벽 아래쪽에서 박쥐들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나는 완전히 혼이 나가 작은 불빛이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기보다는 흐릿하게 느꼈다. 숨을 헉헉대며 내 앞에 나타난 그가 내 모습을 살폈다.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내 입에서 희한한 말이 튀어나왔다.

“저를 해치진 않을 거죠?”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한 손으로 작은 손전등을 비추고 또 다른 손으로는 내 발을 칭칭 감고 있던 가시덤불과 칡넝쿨을 걷어냈다. 그가 무슨 말인가를 했는데 긴장한 나머지 나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신고 있는 흰색 면양말 위로 붉은 핏물이 번졌다. 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어쩌다 이렇게…… 엄청 아플 것 같은데.”

그의 목소리는 굵으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는 앞니로 자신이 입고 있던 흰색 면티셔츠를 찢어서 상처 난 내 발에 동여매 주었다. 나는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기만 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이 시간에 어떻게 여길.”

“고사리를 꺾으러…….”

“고사리를요? 그것도 혼자서요?”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처음에는 탐스럽게 생긴 표고버섯이 눈에 들어왔고 …… 상수리나무 숲을 따라 얼마나 들어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두서없이 말을 하다 나는 그만 울먹이고 말았다. 주변은 여전히 어둡고 적막한데 둘만이 세상 끝에 있는 듯했다. 어디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부엉이들은 전에 없이 힘차게 울어 댔다. 수는 그리 많지 않아 보였으나 동굴과 절벽이 산울림까지 만들어내 마치 수십 마리가 울고 있는 듯했다. 그가 손전등을 비추며 한 발짝 앞서서 걸었다. 툭툭거리는 그의 발소리만이 어둠 속을 울릴 뿐 다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발소리라도 없었다면 산속인지 꿈속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절벽을 돌아오느라 열기를 느꼈던지 그는 회색 점퍼를 벗어 어깨에 걸쳤다. 그가 발걸음을 옮겨놓을 때마다 그의 어깨에 걸쳐놓은 점퍼 자락이 가늘게 흔들렸다. 평평한 길에 닿을 때까지 우리는 말이 없었다. 조금씩 더해오는 발의 통증 탓에 나는 부자연스럽게 걸었다. 그는 멈춰서서 내게 안쓰러운 눈길을 보내오며 내가 다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평평한 길에 닿았을 때 그가 말했다.

“그쪽은 어느 방향이죠?”

“저 아래 행운펜션 맞은…….”

그가 내 말을 잘랐다.

“아! 그 토굴집 말이죠…… 당분간 상처에 물이 닿지 않도록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잠시 후, 그가 들고 있던 손전등을 내게 주며 말했다.

“이건 그쪽이 들고 가는 게 좋을 겁니다.”

나는 손전등을 받아 들면서도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가볍게 머리만 숙여 보이곤 돌아섰다. 나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는데도 왠지 기분만은 상쾌했다. 집에 돌아온 후, 아버지가 알게 될까 봐 조마조마했다. 만약 아버지가 붕대가 감긴 내 발을 보게 된다면 ‘조심하지 않아서 사고를 친 게야!’ 하고 단박에 소리를 지를 게 뻔했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아마도 낮에 점식이 삼촌과 과음한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발소리를 죽이며 방에 들어간 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머리는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었고 회색 점퍼는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방바닥에 앉아서 찬찬히 들여다보니 상처 난 곳은 발목만이 아니었다. 발바닥에는 작은 진주알 같은 물집이 군데군데 보였고 더러는 그 물집이 터져 있는 것도 있었다. 자신이 입고 있던 면티셔츠를 찢어 상처 난 내 발에 동여매 주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사나흘 정도 지나자 발의 상처는 덧나지 않았고 통증도 사라졌다. 나는 해질녘에 아버지 심부름으로 점식이 삼촌네 들렀다가 돌아오던 길에 우연히 그와 마주쳤다.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어떻게 여길?”

“네. 저 통나무집이 우리 삼촌네에요.”

“아! 그렇군요. 나도 저 통나무집 아저씨를 잘 아는데.

참, 발은 좀 어때요?”

“며칠은 좀 그랬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요.”

“다행이네요.”

나는 엷게 웃어 보이며 물었다.

“그쪽은 여길 어떻게?”

“저쪽 산 아래 보이는 회색 기와지붕이 우리 외할머니네예요.”

“어머! 그 절집은 나도 잘 아는데”

밝은 날 보니 그의 모습은 작은오빠와 닮은 것 같았다. 솔직히 닮아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작은오빠로 착각할 정도였다. 다만 그의 키가 작은오빠보다 조금 더 큰 것을 제외하곤 말이다. 윤이 나는 머리카락과 오뚝한 코, 쌍꺼풀은 없었으나 서글서글하게 생긴 두 눈. 게다가 두툼한 입술이 열리면 굵으면서도 부드러운 음성이 울려 퍼져 듣는 이로 하여금 정겨움을 느끼게 하는 것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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