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사람들, 해방 이튿날 일제 신사 파괴”
“울산사람들, 해방 이튿날 일제 신사 파괴”
  • 강귀일
  • 승인 2024.02.12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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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학연구 제18호’, 일제식민지기 울산신사 관련 논고 실려… 북정동·방어진·장생포에 존재
울산역사연구소가 지난해 말 발간한 ‘울산학연구 제18호’
울산역사연구소가 지난해 말 발간한 ‘울산학연구 제18호’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울산사람들은 제일 먼저 일본인들이 세운 신사(神社)를 파괴해버렸다.

울산사람들은 해방 이튿날 울산시 중구 북정동 동헌 뒤편 언덕에 있었던 울산신사로 몰려가 신사의 제단들을 파괴하고 도리이(鳥居)를 부숴 그 잔해들을 땅에 묻었다. 도리이는 지금의 시립미술관과 옛 울산초등학교 터 사이로 난 오르막길에 있었다. 도리이는 일본사람들이 주로 신사 입구에 세워 신사의 관문으로 삼았던 구조물이다.

울산역사연구소가 지난해 말 발간한 ‘울산학연구 제18호’에 부경대학교 문혜진 교수가 쓴 논고 ‘일제식민지기 울산신사사(神社史)와 유구의 활용방안’에는 울산에 있었던 일본 신사들에 관한 연구결과가 실려 있어 주목된다.

이 논고에 따르면 울산에는 북정동의 울산신사를 비롯해 방어진의 신명신사(神明神祠), 장생포의 신명신사가 있었다. 모두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이다.

방어진과 장생포의 신명신사들은 어민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민속신앙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행정중심지인 북정동에 있었던 울산신사는 일본거류민사회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성격이 짙었다. 그런 신사였기에 해방을 맞은 울산사람들에게는 첫 번째 파괴 대상으로 지목된 것이다. 울산사람들은 일제의 지배에 대한 굴종을 강요하던 신사를 철저히 부숴버리면서 새나라 건설을 다짐했을 것이다.

울산지역에서 방어진에 처음 신사가 세워졌다. 방어진에는 한일합방 이전인 1897년부터 일본인 어민들이 이주해 수산항이 형성됐다. 이때 일본 오카야마(岡山)현 히나세(生日) 지역에서 40여명의 방어진에서 거주하며 삼치어업을 시작했다. 방어진에 정착한 일본인 어민들은 점차 늘어 1912년에는 350 가구에 1천400여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1911년에 방어진 서진에 신사를 세웠다. 지금은 신사가 헐린 자리에 용왕사라는 사찰이 들어서 있다. 용왕사에는 수령 500년의 곰솔나무가 있고 신사로 오르던 돌계단이 남아 있다.

울산의 행정과 상업 중심지였던 북정동에 신사가 세워진 것은 1923년이었다. 이 신사에서는 봄과 가을에 마쓰리(祭)가 열리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울산지역 학생들은 단체로 이 신사에 참배해야 했다.

포경항(捕鯨港)으로 발전했던 장생포에도 1927년에 신사가 세워졌다. 천지먼당에 자리잡았던 이 신사도 해방후 헐렸지만 비석의 기단부는 남아 수풀 속에 방치돼 있다.

문혜진 교수는 이 논고의 결론으로 “신사의 유구나 터를 ‘치욕의 역사’로 간주해 방치할 것이 아니라 울산의 어업자원 수탈의 역사적 자료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했으면 한다”고 서술했다.

강귀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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