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 칼럼] 엄마와 설
[명사 칼럼] 엄마와 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4.02.07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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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정엄마의 병증이 심해지면서 요양원으로 모셨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거르지 않았던 친정의 설은 엄마의 입원과 함께 영영 내 곁을 떠났다.

우리네 대표적인 명절인 설은 한 해를 새롭게 맞이한다는 희망을 담고 있기에 늘 설Ž

저마다의 추억 속에 남아 있는 우리 설은 ‘음력설’이다. 그러다가 조선말 을미(1895)개혁으로 양력이 도입되면서 오랜 세월 이어지던 새해 새날이 1896년부터 공식적으로 양력 1월 1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체화되어 있던 음력은 농사부터 사람들의 일상에까지 여전히 남아 있다 보니 양력설과 음력설로 인한 혼란은 100년 가까이 이어졌다.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신정’과 ‘구정’이란 이름으로 오가던 설은 1989년부터 지금처럼 음력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이런 흐름은 설 명절 전후로 휴일을 지정한 정부 시책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필자는 도시에서 꽤 멀리 떨어진 산골에서 나고 자란 탓에 음력설을 손꼽아 기다리던 유년시절을 보냈다. 기억에 남아 있는 유년 시절은 70년대지만, 그 시절 고향 마을은 조선시대 모습에서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먹거리도 즐길 거리도 변변치 않았기에 설은 한 해에 한 번 맞이하는 행복한 날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 날이 되면 소풍 때나 받을 수 있었던 용돈 100원보다 더 많은 세뱃돈을 받아서 좋았고, 강정을 비롯한 맛있는 음식도 실컷 먹고, 새 옷 냄새가 기분 좋은 설빔도 받을 수 있어 마냥 기쁜 날이었다. 아이들의 즐거운 설날 뒤에는 엄마의 고단한 시간이 있었구나 하고 깨달은 것은 나도 성장해서 시집이란 걸 가서였다.

설 준비는 5일장 나들이에서 시작되었다. 고향마을에서는 인근 양산의 서창장을 주로 이용했다. 웅촌에도 장이 섰지만 규모가 작아 물건이 변변치 않았고, 울산장은 너무 멀어서 불편했다. 엄마는 아이들 설빔을 마련하기 위해 무거운 쌀 포대를 머리에 이고 20리 넘는 길을 걸어서 대목장을 봐 왔는데, 아이도 동구 밖까지 나가 온종일 엄마를 기다리느라 발이 시리고 손이 얼었지만 추운 줄을 몰랐다. 그렇게 일찌감치 설빔을 마련하고 나면 설음식을 준비했다. 집집마다 설 준비로 음식을 해서인지 오리는 떨어진 학교 앞에서도 고소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이 무렵 동네 인기 넘버원은 강정 만들 곡식을 튀겨주는 ‘박상(튀밥) 아저씨’였다. 아저씨의 출현 그 자체만으로 동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한 손으로 연신 연기를 쫓으며 또 한 손으로는 기계를 돌리는 박상 아저씨 뒤에는 장작 몇 개와 쌀이며 보리쌀이며 옥수수 포대가 줄지어 늘어섰다. 엄마 심부름 온 아이들은 뻥튀기 차례가 올 때까지 바짝 얼어붙은 논바닥에서 얼음지치기 놀이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뻥튀기 기계 소리가 멈추면, 모두 새빨갛게 언 귀를 양손으로 막고 ‘뻥!’ 소리와 터져 나오는 하얀 연기 속에서 고소하게 튀겨진 박상을 찾아 달려가곤 했었다. 자루 가득 부풀어진 박상을 집으로 들고 오면 엄마는 하루 종일 고아둔 조청을 섞어서 강정을 만들어 식히고 자르셨다.

설이 코앞으로 다가오면 이웃 마을에선 소를 잡았고, 그 고기를 동네 사람들이 골고루 나누었다. 고향 마을이 20여 호 남짓밖에 안 되어서 50호 정도의 옆 마을과 함께 소를 잡았는데, 그 고기 분배 담당은 아버지셨다. 아버지 손에 들린 돌가루 포대 속 쇠고기는 참으로 신선해서 빨간 고추장에 참기름 두세 방울 넣어서 막찍기로 먹으면 아직 식지 않은 생고기가 입안에서 그대로 녹았다. 그 시절 그렇게 먹었던 막찍기 맛을 지금은 어떤 고급 한우집에서도 느낄 수가 없다. 아마도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재 탓이리라. 아니면 세월 따라 변한 내 입맛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어린 시절이었지만 부러울 게 없었던 반세기 전 그 설날이 못내 그리운 것은 이미 기억의 끈을 놓아버린 엄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때도 지키던 친정의 설은 엄마가 요양원으로 가시면서 영영 사라졌다. 그래서 더욱 유년 시절의 설이 그립고 또 그립다.

강혜경 생활환경학 학술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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